국토종단하다 이혼할 뻔 03
“이게 정말 마지막 커피야.”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말했다. 햄 치즈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더스틴이 입을 오물거렸다. 오전 9시 10분. 우리는 철원군 동송 시내의 던킨도너츠에 앉아있다. 계획대로라면 10분 후 백마고지행 버스를 타야 한다. 10분 전, 동송 버스터미널로 갔지만 백마고지로 가는 버스는 없었다. 여기가 아니라고, 길 건너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거기서 타면 된다고 터미널 직원이 말해준 터다. 직원 말대로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가니 버스는 9시 5분에 가고 없었다. 다음 버스는 10시 5분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릴없이 던킨도너츠에 앉아 커피나 마시고 있다.
“우리 좀 바보 아니냐. 버스터미널이 있다고 모든 버스가 터미널에서 떠날 거라고 생각하다니.”
내가 말했다.
“이제 그런 바보짓 할 일도 없어. 백마고지로 가는 버스를 탄 이후에는, 당분간 차 탈 일은 없을 테니까.”
커피는 어느새 반 잔이 남아있다. 한 모금 한 모금이 아깝다. 당분간 차 탈 일도 없지만, 커피를 마실 일도 거의 없다. 국토종단이 시작된 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는 건 우리가 정한 국토종단 행동강령 중 하나다.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다. 닷새 엿새를 연달아 걷고 하루 이틀 휴식을 취한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커피는 휴일에만 마신다. 인터넷이나 카톡 등의 메신저 사용도 휴일에만 한다. 차를 타지 않는다. 하루 한 끼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는다. 가능한 해당 지역 특산품을 먹는다. 매일 글을 쓴다.
“근데 백마고지에는 왜 가는데?”
더스틴이 물었다. 야 내가 몇 번을 말하냐. ‘철마는 달리고 싶다’ 때문에 간다니까. 백마고지에 가면 철마가 하나 있어. 남북 단절 때문에 멈춰버린 철마야. 녹슨 철마와 함께 녹슨 싸인도 하나 서 있는데, 거기 비장하게 쓰여 있어. 철마는 달리고 싶다고.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답을 찾는 여행의 시작으로 꽤 어울리잖아. 역사적 의미도 있고….
한 모금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내고 버스를 타러 갔다. 버스는 20여분 정도 시골길을 달린 후에 백마고지역에 우리를 뱉어냈다. 역사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새로 세웠는지 때 하나 안 탄, ‘백마고지’라 써진 파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있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고 써진 하얀색 표지 역시, 물티슈로 갓 닦아낸 듯 깨끗하다. 뭐지. 저거보다 한참은 녹슬어있어야 하는데. 표지에서 쇠 껍질이 뚝뚝 떨어지고 막 그래야 하는데…. 저기, 관광안내소 있다. 더스틴이 오른쪽을 가리켰다.
“저…. 안녕하세요…. 혹시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지요. 그게 저거예요?”
관광안내소 창구는 마치 매표소처럼 되어있었다. 작은 구멍들이 규칙적으로 뚫린 플라스틱 창문 뒤로 갓 세팅한 듯 풍성한 파마머리의 중년의 여성이 앉아있다. 철마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되물었다. 아 그 철마…. 그건 여기 아닌데. 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건 백마고지역이 아니고 월정리역이죠.
“아…. 월정리역이구나. 여기서 멀어요? 걸어갈 수 있어요?”
“걸어간다고? 걸어가긴 멀지. 그리고 걸어갈 수도 없어. 안보지역이라 안돼요. 거긴 투어로만 갈 수 있어요.”
“투어요?”
내가 되물었다. 투어? …. 더스틴과 나는 서로를 멀뚱히 쳐다봤다. 관광안내소 옆으로, 안보관광을 안내하는 커다란 표지판이 보였다. 안보관광에는 다양한 코스가 있었다. 월정리역으로 가려면 백마고지역에서 시작해서 철원평화전망대, 제2땅굴, 월정리역 등을 거치는 안보관광 코스에 참여하면 된다.
“투어는…. 좀 그렇지 않아?”
내가 입을 뗐다. 차는 타지 않는다는 행동강령까지 정했는데, 첫날부터 차를 타는 건 좀 아니잖아. 그리고, 국토종단의 첫 발을 떼는 시작점인데 투어로 간다는 게…. 이상하잖아.
“음….”
더스틴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가격이 얼만데? 만 오천 원. 그럼 둘이 하면 3만 원이네…. 가격은 왜 물어? 하게? 내가 되물었다. 아니 뭐 좀 생각을 해보자는 거지. 생각을 하긴 뭘 해. 처음부터 끝까지 걷자고 온 여행을 투어로 시작할 순 없잖아. 그게 아니고 내 말은, 더스틴이 말을 받았다. 꼭 투어를 하자는 게 아니고, 월정리역에서부터 걸음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는 거지.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월정리역에서부터 걸음을 시작하고 싶다는 건 너였잖아.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거야. 국토종단을 ‘철마는 달리고 싶다’에서 시작하는 것과, 차나 투어의 힘을 빌리지 않고 걸음으로 시작하는 것 중 어느 게 우리에게 중요한지를 생각해보자고.
“아, 오늘 그 투어 못하겠다. 최소 인원이 10명은 돼야 출발하거든요. 월요일인데 사람이 더 올 리도 없고.”
안내소 창문 저 너머로 사라져 커피믹스를 홀짝이던 직원이 다시 창가로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
"택시를 타고 갈 수는 있어요."
직원이 덧붙였다. 안내소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 한 명이 막 소개를 받은 토크쇼 게스트처럼 두 발짝 성큼 우리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뒤로 택시 한 대가 보였다. 우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안내소를 떠났다.
잘됐네. 파란 배낭을 메고 앞으로 걸어가던 더스틴이 잠시 멈춰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택지 두 개 중 하나가 사라졌으니, 남은 선택은 하나야.
"철마가 달리고 싶은 곳에서 시작할 수 없다면, 걸어서 갈 수 있는 최북단에서 시작하면 돼.”
“그게 어딘데?”
"백마고지 기념관.”
"에잇.... 멋없게."
그렇게 시작되었다. 철원에서부터 부산까지, 800km 너머를 향해가는 우리의 발걸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