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단하다 이혼할 뻔 12
“…. 네 잠시만요!”
이런. 안에서 소리가 나고 잠시 후, 철문이 열렸다.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 여자의 어깨 뒤로 푹신한 소파가 보였다. 집 안에서 달콤한 믹스커피 향내가 돌았다. 동그란 안경 속에 담긴 여자의 두 눈이 나를 훑었다. 쿵쾅대던 심장이 여자의 부드러운 인상 덕에 점차 제 속도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세요?”
“아 저 그게…. 저희가 국토종단 중인데. 이 근처에 적당한 민박도 없고 해서…. 혹시 여기 아래 교회 마당에다가 텐트 치고 하룻밤 잘 수 있을까 하는데. 교회에 아무도 없으신 것 같고…. 목사님 번호가 적혀있긴 한데 전화를 안 받아서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난. 말 좀 똑바로 할 수 없을까.
“아 그럼. 제가 교회 지인한테 전화 걸어볼게요. 여기서 잠깐 기다리실래요?”
다행이다. 두서없는 내 말을 용케도 알아들어줘서. 여자가 문을 닫았다. 2분여간의 시간이 지났다. 불편하다. 괜히 귀찮게 한 거 같아서. 불안하다. 안된다고 할까 봐. 되겠지. 지인이 있다고 하니까…. 안된다고 하면 어쩌지. 이 빗속에 어디로 가야 하지.
“텐트에서 자지 마시고.”
여자가 다시 문을 열더니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아….
“불편하잖아요. 비도 오고. 교회 방문 열려있다고, 들어가서 자시래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마당에 텐트 치면 돼요.”
“어차피 아무도 없어서 편하게 쓰시면 된다던데.”
“아니에요. 마당도 괜찮아요. 번거로우셨을 텐데, 교회에 연락해주셔서 감사해요.”
더스틴이 있는 마당으로 돌아갔다. 감사한 분이네. 다행이다. 비 쏟아지기 전에 잘 데를 구해서. 배낭에서 텐트를 꺼내며 더스틴이 말했다. 여기 좋다. 마당에 잔디가 깔려있어 바닥도 푹신하고.
“배고프지 않냐. 근데, 우리 먹을 거 없어.”
내가 말했다. 객사를 면하고 나니 허기가 올라온다. 더스틴은 괜찮을 거다. 더스틴은 배고파도 잘 참으니까. 내가 문제다. 배고프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책도 못 보고, 잠도 못 자고, 오직 배고프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채운 채 오롯이 앉아 있어야 한다.
“에너지바 딱 두 개 있는데…. 비 더 오기 전에 라면이라도 사 올까?”
내가 물었다. 그래 그러자. 근데 상점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지. 더스틴이 말했다. 스마트폰 지도로 상점을 찾아봤다. 안 뜬다. 어떡하지. 배가 고픈데. 밤이 깊어지면 더 고파질 텐데.
“상점이 너무 작아서 지도에 안 나오는 걸 거야. 아까 그분한테 한 번 물어보고 올게. 근처에 상점 있냐고.”
계단을 오른다. 단단한 철문이 다시 내 앞에 당도했다. 돌아갈까. 너무 염치없이 귀찮게 구는 건 아닌지…. 배 한가운데로 번개 같은 허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하, 그래. 어떻게든 밥은 먹어야잖아. 밥을 먹으려면 폐를 끼칠 수밖에.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동글동글한 여자의 인상에 다시 긴장이 녹아들었다. 처음 문을 두드렸을 때도 부드러웠던 여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감사한 분이다.
“또 귀찮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한데. 혹시 근처에 상점 같은 게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아…. 이 근처에는 가게가 없어요. 어쩌지…. 뭐가 필요하신데요?”
“그게…. 라면 같은 거 좀 사려고요.”
나는 이불에 오줌을 지린 벌로 소금을 얻으러 온 애처럼 쭈뼛댔다. 한심하다. 서른 넘은 나이에 혼자 힘으로 밥 한 끼 챙겨 먹지 못해 쭈뼛거리고 있다니. 아 그래요? 그러시면…. 잠시만요. 문을 닫고 사라진 여자는 5분 후 커다란 쇼핑백과 함께 등장했다. 쇼핑백은 묵직했다.
“내일 아침까지 넉넉히 드세요.”
여자가 쇼핑백을 건넸다. 아 뭘 이렇게나 많이.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염치없지만 라면만 하나 얻어갈게요.”
“아니에요, 다 가져가세요. 이 근처에 가게가 없거든요. 물도 필요하실 테고, 내일 아침도 드셔야 하지 않아요?”
“아…. 그건 그런데….”
반박은 못하겠다. 물은 필요하고, 내일 아침도 먹어야 하긴 하니까. 고맙다. 하지만 고마움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공짜 음식을 얻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라면 하나 미리 챙겨두지 못한 건 우리 잘못인데, 해결해주는 사람은 왜 타인이 되어야 하나. 우리의 의지로 걷자고 온 여행인데, 어쩌다 뒷감당은 너그러운 타인의 몫이 되어버렸을까.
우울한 심정이 되어 텐트로 돌아갔다. 더스틴은 엉덩이를 씰룩대며 텐트 안에서 침낭을 펼치고 있다. 그의 엉덩이를 툭 쳤다.
"이거 봐."
"뭐야 이게?”
“윗집 여자분이 주셨어. 먹으라고.”
“뭐가 이렇게 많아?"
"근처에 가게가 없대. 내일 아침까지 두고 넉넉히 먹으래."
묵직한 쇼핑백을 열어봤다. 쇼핑백 안에는 우리의 상황을 짐작해봤을 여자의 사려 깊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갈증과 더위를 풀어줄 반쯤 얼린 보리차 한 통. 넉넉한 식량이 될 라면 네 개와 밥 두 덩이, 계란 여섯 개. 곁들여 먹을 갓김치 한 포기. 입가심할 포도 세 송이. 비상식량이 될 초콜릿 한 봉지. 둘이 삼일은 족히 먹을 양이다.
"돌려 드리자. 이렇게 많이 필요 없잖아."
더스틴이 말했다.
“동의는 하는데, 이미 마음 써서 주신 걸 도로 돌려주는 것도 좀 그래.”
“그래도. 급하니까 도움을 받을 순 있어도….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받는 건 좀 그렇잖아.”
“내일 아쉽지 않을까? 또 종일 먹을 거 못 구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이걸 다 들고 다닐 순 없어.”
그래. 네 말이 맞다. 내일의 끼니를 생각한 욕심은 고스란히 어깨 위로 올라와 짐이 된다. 오늘 이후의 시간, 내일과 그 후를 걱정하는 건 지금의 우리에겐 욕심이고 오만이다. 우리는 당장의 끼니를 해결해 줄 수 있으면서도 윗집 살림살이에 크게 축이 나지 않을 음식만 골라냈다. 밥 한 덩이. 라면 한 개. 날계란 두 개. 갓김치 한쪽.
“왜요? 다 드시지. 괜찮은데.”
쇼핑백을 돌려드리려 다시 집으로 올라갔다.
“아니요. 너무 많이 주셔서. 라면이랑 밥, 김치만 좀 챙겼어요. 그거면 충분해요.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텐트로 돌아와 밥과 갓김치를 허겁지겁 먹었다. 좀 먹었더니 살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지더니 이내 후드득,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저기로 옮기자! 더스틴이 주차장 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슬레이트 지붕이 달려있는 주차장이었다. 텐트 안에서 배낭을 꺼내 주차장으로 옮기고, 텐트를 옮겼다. 투두두두두두두. 머리 위로 떨어지던 비가 슬레이트 지붕 위로 시끄럽게 떨어졌다.
“신기해. 빗소리는 우렁찬데 머리 위로는 비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 게.”
내가 말했다. 돈 한 푼 안 내고 이렇게 남의 집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처음 본 사람한테 밥을 얻어먹은 것도 신기해. 더스틴이 말했다.
“돈을 안내서 불편한가…. 만약 조금의 돈을 냈으면 안 불편했을까?”
내가 물었다. 돈을 내면 상대방이 불편해지겠지. 돈 받으려고 베푼 친절이 아닌데. 더스틴이 말했다. 근데 그것도 좀 웃기다. 돈을 낸다고 해도 남의 도움을 받는 건 마찬가진데. 폐를 끼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근데 돈을 내면 남의 수고로움을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고 그냥 넘겨버리잖아. 이상해 그것도. 내가 말했다.
“그런 거 싫은데. 어찌할 수 없어 도움을 받아야 하는 무력함. 근데…. 이 여행에서는 그걸 피할 수 없어.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 오늘처럼 말이야. 남에게 폐를 끼칠 수밖에 없어. 돈이 있어도 돈과 물건을 교환할 수 없는 상점이 없으면, 돈 대신 남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잖아. 민박집 같은 숙박 시설이 없으면 양해를 구하고 남의 땅 위에 텐트를 치는 수밖에 없고.”
내가 말했다. 어쩌면 이 여행은 우리가 남에게 폐를 끼치고 살 수밖에 없다는 거, 남의 수고가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생각해보게 하는 경험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직장생활을 할 땐, 누군가 나의 수고를 딱히 늘 고마워하진 않잖아. 난 월급을 받으니까. 가게에서 뭘 살 때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내가 그들의 수고를 진심으로 고마워하지 않지. 난 돈을 내니까. 사실 그러는 편이 더 편해. 돈을 내고 타인의 수고로움은 잊어버리는 편이. 근데 지금처럼 돈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땐, 돈 대신 마음을 써야 해. 폐를 끼쳐 미안한 마음, 불편한 마음, 그리고 고마운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