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단하다 이혼할 뻔 11
한 시간 가량을 더 걸으니 문혜리다. 속셈학원, 컴퓨터 수리점 등이 있는 걸 보니 꽤 큰 마을인 것 같다. 작은 슈퍼가 보였다. 배낭을 벗어던지고 어둑한 상점에 들어가 2L짜리 물을 샀다. 목이 너무 말라 빨리 마시고 싶은 마음에 손이 덜덜 떨리는데 물 뚜껑은 잘 열리지 않는다. 기어코 뚜껑을 열자 병에서 물이 철철 흘러넘쳤다. 입 안에 들이부었다. 오른쪽 볼 위로 물이 잔뜩 흘러내렸다. 살 것 같다.
“여행하는 중이에요?”
상점 안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나와 물었다. 네. 더스틴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틈을 타 내가 답했다.
“응…. 저기. 옥수수 삶아 놓은 거 있는데 좀 줄까요?”
“네? 아…. 네.”
네,라고 대답해놓고 나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낯선 사람의 호의를 이렇게 덥석 받아버리다니. 나는 낯을 가리는 사람인데. 낯선 사람이 친절을 베풀면 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에 거절하는 사람인데. 네, 라니. 아니 먹을 게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조금 커졌으니 네, 라기보단 네! 였다.
“그럼 오케이! 여기 조금만 있어봐요. 집이 바로 요 앞이라, 금방 다녀올게.”
“아…. 네. 감사해요.”
아주머니가 길을 건넜다. 힘찬 발걸음에 꽃무늬 원피스가 나풀댔다. 아주머니가 옥수수 주신대. 그래서 받는다고 했어? 더스틴이 물었다. 응. 너무 배고파서. 일부러 집에 가서 가져오셔야 하는 건지는 몰랐네…. 미안하네….
“여기. 아침에 삶은 거라서 조금 딱딱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자. 먹어요.”
다시 나타난 아주머니가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봉지 안에서 하얀 김이 솔솔 나왔다.
“와.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응 아녀. 아주머니가 손을 내젓더니 다시 집으로 들어가신다. 검은 봉지 안에는 투명한 비닐봉지가 들어있다. 안에 담긴 노란 옥수수 하나, 까만 옥수수 하나. 아주머니 말대로 조금 딱딱하지만, 배고픈 몸에는 꿀맛이다. 순식간에 옥수수 하나를 해치우고, 아직 반 병 정도 남은 물통의 물을 다시 꿀떡꿀떡 마셨다. 이제 갈까? 더스틴이 말했다. 응 이제 가자. 자등리로.
빠르게 움직이던 더스틴의 두 발이 멈췄다. 더스틴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봤다. 하늘. 빗방울. 뚝, 내 오른쪽 눈가로 떨어졌다. 고개를 내렸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쩌지?”
그가 물었다.
“뭐…. 이 정도면 더 걸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빗방울이 굵고 잦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100m 앞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배낭을 벗어 의자 위에 내려놨다. 우리는 각자의 배낭에서 우비를 꺼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더스틴이 물었다.
“일단 자등리 방향으로 가야 하긴 하는데…. 어디까지 가야 숙소가 나올지는 모르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걸어야 한다는 게 문제지. 내가 말했다.
“…. 가자.”
그가 말했다. 그래, 가자. 어딘지는 모르지만, 가자.
다행히 비가 조금 잦아들었다. 안경알 위에 달라붙은 빗방울 사이로 앞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연두색 버스가 빗물을 튀기며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은색 머리를 뽀글뽀글하게 만 할머니 한 분이 버스 창문 너머 우리를 바라봤다. 오토바이 한 대가 우리 앞에 섰다. 오토바이에는 하얀 비닐 우비를 뒤집어쓴 중년 남자가 타고 있었다. 여행 다니시나 봐요?
"걸어서 다녀요?”
남자가 물었다.
"네."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부산이요."
“부산? 여기가 철원인데?”
“네. 부산에 가요.”
“아휴…. 힘드시겠네. 근데 왜 걸어요?”
왜냐고? 옆에 선 더스틴을 슬쩍 바라봤다. 야. 우리 왜 걷는 거였지? 더스틴에게 물었다. 더스틴은 대답 대신 이마 위에 맺힌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을 닦아냈다. 더스틴의 하얀 이마를 쳐다보며, 여행을 떠나기 전 집 방구석에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봤다. 힘든 여행일 거야. 계속 걸어 다녀야 하니까. 그래도 가야 하는 이유가 뭐지? …. 너를 더 이해하고 싶으니까. 너를 더 이해하려면 나를 더 이해해야 할 테니까. 걸어 다니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우리와 세대가, 사고방식이, 사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 그럼 조금 더 생각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 글쎄요….”
떠오르는 생각은 많지만 대충 얼버무린다. 빗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우리의 여행에 대해서, 삶이 던져주는 고민에 대해 주절이 주절이 떠들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그래요. 나도 언젠가 해보고 싶네. 여행 잘해요. 화이팅입니다! 남자가 하늘 위로 주먹을 치켜세우더니 다시 부르릉, 하고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반대 길로 사라졌다. 비가 세게 쏟아진다. 문혜 사거리를 지나니 철원 소방서가 보였다. 그다음은 문혜 2리. 그다음은 문혜 3리. 문혜 4리….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물집 괜찮아? 계속 걸을 수 있는 거야?”
뒤뚱거리는 더스틴의 발걸음. 걷기는커녕 발을 딛고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인다. 어디 한 번 봐봐. 내가 말했다. 괜찮아. 그러지 말고 쪼리 벗어봐. 더스틴이 멈춰 서서 신발을 벗었다. 더스틴의 하얀 발바닥이 드러났다. 물집은 두 배 크기로 커져있다.
“어떡하지.”
내가 중얼거렸다. 비도 오고, 물집도 났고, 근처에는 민박도 없는 것 같고…. 일단 조금 더 걸어보자. 뭔가 나오겠지. 더스틴이 말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작은 교회가 보였다. 저기에 물어볼까? 마당 같은 게 있으면 텐트 쳐도 되냐고…. 내가 말했다. 그래. 자등리까지는 못 가겠어. 더스틴이 말했다. 교회에는 아무도 없었다. 목사님 전화번호가 써져있길래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교회 위쪽으로 작은 집이 보였다. 붉은 벽돌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작은 건물 가운데로, 학과 달 등이 그려져 있는 단단한 철문이 나 있는. 집에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넌 발 아프니까 여기 있어, 내가 가서 물어볼게. 계단을 올랐다. 철문 앞에 서서 숨을 길게 가다듬었다.
“계세요?”
문을 두드렸다. …. 괜히 두드렸나. 진짜 누가 있으면 어쩌지. 문을 열고 누가 나오면 뭐라고 말하지. 아니지. 누가 없으면 그땐 어떡하나. 오늘 밤을 어디서 보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