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말했다, “밥 굶지 말고 잘 다녀잉?”

국토종단하다 이혼할 뻔 16

by 두지

"가게!"


눈을 꼭 감아 눈물을 쥐어짠 후 다시 떴다. 조금 더 선명해진 시야. 그 안으로 들어온 하얀색 낡은 단층 건물과 파란 간판. 가게야! 다시금 외쳤지만, 더스틴은 눈도 끔쩍 않는다.


“야! 가게야, 가게라고!"

"됐어. 닫혀있을 게 뻔한데 뭐."


더스틴이 말했다. 밝혀두건대, 더스틴은 비관론자가 아니다. 시골길이 준 좌절과 실망이 더스틴을 이렇게 만들어버렸을 뿐. 지금껏 지나친 작은 마을에는 집 몇 채만 심심하게 서 있었지 지나가는 사람도, 문을 연 가게도, 밥 냄새나는 식당도 없었다. 아주 가끔 보이는 상점들은 폐허인 경우가 잦았다. 그래, 차라리 너처럼 불행을 예상하는 게 나을지도. 좌절에 대비해서 말이지. 가게 문이 굳게 잠겨있어도 실망하지 말자. 사창리까지 두 시간만 더 걸으면 되니까.


"열렸어!"


가게 여닫이 문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자 문이 스르륵, 별 저항 없이 열렸다. 땅바닥에 배낭을 내팽개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상점 안에는 지난 며칠간 구경도 못 한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칸쵸, 빼빼로, 새우깡, 양파링, 새콤달콤, 자유시간, 신라면, 삼양라면, 짜파게티…. 허기가 양떼처럼 몰려들었다. 두근대는 심장이 개중에 칼로리 높은 식량을 볼 때마다 바로 그거야!라고 소리치듯 힘껏 요동쳤다. 물 한 통, 망고 주스, 자유시간, 초콜릿, 메로나 두 개. 가게 앞 대청마루에 식량을 늘어놓고 그것들을 말없이 해치웠다. 달콤하고 시원한 맛에 반쯤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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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좀 더 살까?"


다 빨아먹은 메로나의 막대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내가 말했다.


“어. 사창리에 거의 다 오긴 했지만, 어제처럼 저녁을 굶을 상황이 닥칠지도 모르니까.”


더스틴이 말했다. 그렇지? 우리도 이제 좀 현명해졌다. 앞일 걱정은 전혀 않던 철없는 우리도 며칠 걷고 나자 앞으로의 허기를 두려워하고 예비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남들처럼 10년 뒤까지는 대비 못 하더라도 말이다. 여행을 통한 자아 성장이라고나 할까.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공간. 비좁은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을 통해 겨우 보이는 몇 개 안 되는 물건. 라면 두 개를 집었다. 내 기척에 주인 할머니가 다시 뒷방에서 나왔다. 값을 치르고 대청마루로 나와 쭈쭈바를 빨았다. 상점의 어두운 틈새로 하얀 머리카락이 쭈뼛이 삐져나왔다.


"걸어서 댕기는 거야?"


할머니의 작고 주름진 입이 조곤조곤. 네. 내가 답했다. 어디서부터 걸었는디? 오늘은 잠곡리에서부터 걸었어요. 근데 중간에 이런 가게가 하나도 없어서 쫄쫄 굶었어요. …. 또 이런다 나. 그만 투덜대야 하는데. 길을 걸으며 생긴 못된 버릇이다. 낯선 사람 붙잡고 나 힘들다, 덥다, 배고프다 투덜투덜.


"이런 시골 마을엔 나 같은 노인네들만 살아. 그러니 가게가 있나. 다른 사람들은 명절 때나 들리니까. …. 들어와. 밖에는 더우니까 안으로 들어와서 쉬어."

"아니에요 할머니. 여기 조금만 더 앉아있다가 사창리로 가려고요."

"아 밖에 더우니까 언능 들어와. 들어와서 선풍기 바람 좀 쐬어!"


할머니의 호통 아닌 호통에 다시 까만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 앉아. 상점 가운데 놓인 하얀 플라스틱 의자를 가리키며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말 잘 듣는 백구 두 마리처럼 의자에 나란히 앉아 할머니를 바라봤다. 할머니는 맞은편 탁자 위에 올려진 선풍기를 틀더니, 잘 돌아가지 않는 선풍기 고개를 자꾸만 우리 쪽으로 꺾었다. 아담한 키. 깡 마른 몸. 살짝 굽은 등. 할머니가 선풍기 고개를 왼쪽으로 꺾을 때마다 할머니의 짧고 하얀 머리도 살랑, 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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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여기가 고향이에요?”

내가 물었다. 아니, 난 이북서 왔어. 할머니가 말했다. 아…. 언제 오셨는데요?


“내가 8살 꼬마였을 때. 그때 전쟁이 터져가지고. 그때 피난 온 데가 여기 명월리야.”

“아….”

“피난이라고 왔지만…. 여기서도 하루하루가 전쟁터였지. 밖에 나와 있으면 하늘 위로 헬리콥터가 요래 지나가. 그럼 어째. 꿩마냥 땅속에 머리를 처박고 무서워서 몸을 벌벌 떨고. 그렇게 살았어.”

“아….”


바보같이 아….라는 소리만 계속 나온다. 하긴, 달리 뭐라고 할 수 있는 말도 없다. 주름진 얼굴 위에 다이아몬드처럼 박힌 할머니의 두 눈이 촉촉하다.


“무서우셨겠어요…. 힘드셨겠어요….”

“그때 고생은 말도 마…. 이게 피난 와서 지은 집이야. 그때 지은 집이 지금까지 이렇게 있어.”

“아, 이 가게가요? 그럼 정말 오래된 집이네요.”


창호지로 곱게 바른 미닫이문. 문 가운데는 안을 살필 수 있는 작은 창이 달려있었다. 노란색 물 주전자. 마시다 만 생수. 신문지 위에 늘어놓은 쪽파. 이따금 스쳐가는 할아버지의 두 발. 저 미닫이문의 이쪽과 저쪽을 수도 없이 넘나들며 새 삶을 시작하고, 생계를 꾸리고, 저축을 하고, 자식을 키웠을 할머니의 삶을 잠시 짐작해봤다.


“자식 네 명 공부시켜서 서울로 보냈어. 지금은 다 시집 장가가서 나름 잘 살어.”

“아…. 대단하세요 할머니.”

“지금도 전화하면 자꾸 서울서 같이 살자고 난리여.”

“그럼 가시지 왜 안 가세요. 여기서 할아버지랑 둘이 살면 외롭지 않으세요?”

“아니, 난 싫어. 젊은 사람들도 노인네랑 사는 거 싫지만, 노인네도 마찬가지야. 아들 며느리 눈치 보며 사는 게 뭐가 좋아.”

“그래요? 그렇구나….”


“…. 근디. 그르케 걸어당김 간식거리는 어서 나와?"

“간식거리요? 누가 간식거리를 줘요? 저희가 직접 가지고 다녀야지."

"그럼 들고 다니는 그 간식이라도 먹지 왜 굶고 다녀."

"그저께 밤에 심심해서 다 까먹어버렸어요."

"으이그. 잘 헌다."


낮에 배고플 걸 알면서도 잘 안 되더라고요. 가방 안에 먹을 게 있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안 먹어요. 에헤헤. 내가 웃었다. 할머니도 웃었다. 할머니 얼굴에 주름이 더 깊이 푸욱, 파였다. 아, 좋다. 오후 내내 이 어둡고 서늘한 상점에서, 고개가 잘 비틀어지지 않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할머니에게 투정이나 부리고 싶다. 할머니라면 다 들어주실 것 같다. 저 자그마한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뻘겠던 얼굴이 하얗게 되돌아오고 나서야 가게 문을 나섰다. 할머니가 굽은 등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우리를 좇았다.


“굶으면 안디어. 사람이 밥을 먹고살아야지. 밥 굶고 다니는 건 멍청한 짓이여…. 밥 굶지 말고 잘 다녀잉?"

"네 할머니."

내가 대답했다.

"캄사합니다!"

더스틴이 외쳤다. 할머니가 주름진 손을 들고 흔들었다. 한참을 걷다 다시 뒤를 돌아봤다. 할머니가 뒷짐을 지고 우리를 보고 있다. 우리는 사창리를 향해 걸었다. 할머니 보라고, 일부러 더 씩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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