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단하다 이혼할 뻔 18
“가게다.”
더스틴이 말했다. 오탄 2리로 들어서자 작은 상점이 보였다. 도로 건너편에도 상점이 있다. 그 옆에는 버스 정류장. 역시 춘천은 달라. 내가 말했다. 이렇게 새소리만 가득한 인적 드문 마을에도 가게가 두 개나 있다니. 들어가자. 물 사자. 목마르다.
“어? 닫혔나?”
내가 말했다. 그림자 드리워진 서늘한 가게 앞. 미닫이 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있다. 잠깐 닫은 게 아닌 것 같아. 더스틴이 말했다. 건너편 저 가게도…. 닫은 것 같네.
“수지, 저기서 누가 우리 불러.”
더스틴의 말에 길 건너를 살폈다. 새소리인 줄 알았는데 사람 소리였구나. 저기 저 버스 정류장에 앉아 계신 분. 더스틴이 다시 말했다. 건너편 오탄리 버스정류장. 분홍색 재킷을 입은 할머니 한 분이 봄 철쭉처럼 앉아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저기로 오라는 것 같은데.”
더스틴이 말했다. 할머니의 손짓을 좇아 길을 건넜다. 혹시 저 가게요…. 잦은 숨을 고르며 내가 물었다. 할머니, 저 가게 문 언제 여는지 아세요?
"으응. 아 가방 좀 벗어. 좀 쉬어.”
할머니가 버스 정류장 의자를 두드렸다. 아? 음…. 그러죠 뭐, 시간도 많은데. 우리는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정류장에 앉았다. 할머니. 할머니 옆에 나. 내 옆에 더스틴. 이렇게 오탄 2리 버스정류장 지붕 아래 나란히 앉아있으니까 꼭,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다정하다.
"저기 안 열어. 이런 동네 가게는 다 문 닫았어. 요새 사람들은 차 타고 시내 대형마트 가서 장 보지 이런 데선 물건 안 사니까. 그 옆에서 장사하던 늙은이도 이제 안 하고 말더라고."
“그렇구나…. 다 대형마트 때문이구나….”
이런 동네 가게에는 노인들이나 가끔 들른다는 명월리 할머니의 말, 거기에 오탄리 할머니의 지론을 합하니 답이 나온다. 우리가 어제고 그제고 그토록 배를 곯은 이유는 다, 대형마트 때문이다. 물건도 별로 없고 가격도 더 비싼 동네 작은 상점 대신 시내 대형마트로 차를 몰고 가서, 한꺼번에 많은 물건을 산 후 집 안에 풍족하게 쌓아놓으면 되니까. 시내 대형마트까지 차를 타고 갈 수도 없을뿐더러, 물건을 저장해 놓을 곳이라고는 이미 꽉 찬 30L들이 배낭의 주머니 한 칸 정도인 우리 같은 유목민들은 점점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버스 기다리시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응. 누가 말린 고추 좀 갖다 달래서. 춘천 시내 가는 길이야."
할머니가 옆에 얌전하게 놓여있는 새빨간 고추 봉지를 톡톡 두드렸다. 빨간 고추를 담았던 할머니의 눈이 나와 더스틴의 얼굴을 차례로 들여다본다.
"그래. 그렇게 걸어서 댕기는 거야?"
"네."
"어디부터 왔는데?"
"백마고지에서 왔고요."
"어후야. 그래서, 서울까지 가?"
“아니요. 부산까지 가려고요."
"어휴. 재미로?"
"재미? 음... 재민가? 음... 아뇨 재미는 아니고..."
"재미지겠네? 히히히! 근데 둘이 그렇게 다니는 거야?"
할머니는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더니 더스틴에게 손을 흔들었다. 빨간 고추로 덧칠한 듯 빨간 더스틴의 양 볼이 씨익, 올라갔다.
"재미없어요 할머니. 방금도 요 마을 앞에서 둘이 한참 싸우다 왔어요.”
“으잉? 싸워?”
“네. 막 소리 지르면서 싸웠는데요?"
“으잉? 아 왜 싸워! 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잘해줘야지 왜 싸워!"
할머니가 다시 고개를 쑥 빼고는 더스틴을 쳐다봤다. 할머니가 뭐라고 하시는 거야? 더스틴이 물었다. 너보고 못된 놈이래. 어떻게 나처럼 예쁜 아가씨랑 싸우냐고. 잘해주지는 못할망정. 내가 말했다. 그래서 말했어? 나 못된 놈 아니라고. 네가 못된 애라고. 더스틴이 물었다. 아니? 내가 왜?
"외국 아저씨네. 애인이야?"
"아뇨, 남편."
“그래?”
“네….”
옥색 빛 커다란 보석이 박힌 반지를 낀 할머니의 손. 그 손을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또 튀기 소리가 나오려나….
“나도 있잖아. 옛날에 외국인이랑 결혼할 뻔했어."
"아 그래요?”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들어 할머니의 두 눈을 바라봤다. 미소 반, 걱정 반이 섞인 할머니의 얼굴.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을 것 같다. 어서 얘기해줘요 할머니. 그다음엔 어떻게 됐어요?
"왜 그랬냐믄. 내가 고아야. 12살 때 고아가 됐어. 전쟁 때 폭격이 터져서 부모님 돌아가시고 언니 세 명 있는 거 다 흩어졌어. 그때 살던 데가 인천이었는데. 가족이 다 흩어지고 나는 친척 집으로 갔지. 그 집에서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아주 힘들게 살았어. 옛날 얘기하면 눈물 나….”
“에구.”
"... 부모도 없고 가난하니까, 스물한 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간 거야. 그 당시는 결혼하기에 늦은 나이였지. 내가 어렸을 때 얼굴은 되게 예뻤다?”
할머니가 히히, 작게 웃으신다.
“그랬을 것 같아요. 지금도 예쁘세요. 엄청 멋쟁이시고. 요 목걸이랑 반지 되게 잘 어울리세요.”
“그래? 히히. 근데…. 예쁘면 뭘 해. 그때는 예쁜 얼굴 다 소용없었어. 하다못해 이불 하나라도 있어야 누가 데려가지. 부모도 없으니 누가 주선도 안 해주고. 그러니까 주위에서 자꾸 나보고 외국 사람이랑 결혼하래. 미군이랑 결혼해서 잘 사는 사람 많다면서.”
“아. 근데 왜 안 하셨어요?”
“지금은 몰라도 그땐 그랬어. 아이 난 외국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무섭더라고."
“아…. 그랬을 것 같아요. 지금도 아니고 그때라면.”
“그러다가 먼 친척이 주선해서 선을 봤어. 내가 가난하니까, 선 본 집도 가난한 집이었어. 없는 사람이랑 결혼했지. 그리고 일주일 만에 아저씨가 군대를 갔네.”
“일주일 만에요?”
“응. 지금은 군대 몇 년 가? 2년 가나? 그때는 3년씩 군대 갔으니까. 아저씨 군대 가버리고 나는 우리 첫 딸 등에 업고 온갖 일을 다했지.”
“무슨 일 하셨는데요?”
“딸 등에 업고 있는데. 집 앞에 공사하는 아저씨들이 나보고 밥을 해달라네. 그래서 그때서부터 애 등에 업고 밥하고 빨래해주고. 산에 가서 나물 캐고…. 아주 힘들게 살았어.”
“그러셨구나. 힘드셨겠어요….”
할머니의 두 눈에 물이 맺혔다. 눈물은 보석처럼 반짝이다 이내 사라졌다.
“그래도, 우리 자식들 이제 다 잘 살어. 우리 첫째는 저 강남서 일하고. 둘째는 커다란 건물 지어서 사업하고.”
“와. 대단하세요 할머니. 커다란 나무 같으세요.”
“나는 그래서 베풀고 살려고 해. 내가 하도 외롭고 가난하게 살았으니까. 배 굶고 지나가는 사람 있으면 밥 주고. 쉬고 가라 하고. 베풀고 살려고 해. 그러면 천지신명님이 다 돕나 봐. 나 봐봐. 우리 자식들 다 잘 살잖아. …. 곧 추석 되면 우리 손주 손녀 다 울 집으로 온다? 히히.”
“그래요? 좋으시겠다. 정말 복 받으신 건가 봐요. 저희는 저희 앞가림도 힘들어서 남은 잘 못 보고 살아요.”
“…. 근데, 집은 어디야?”
"저희 집이요? 그게... 원래 서울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없어? 집이 없어? 그럼 미국에 집이 있어?"
“아뇨. 미국엔 잘 가지도 않아요."
"그럼 미국에도 한국에도 집이 없어? 진짜로 집이 없어?"
“네. 말씀드렸잖아요. 앞가림도 못한다고. 하하하….”
"아이 그럼 어쪄! 그럼 여기 와 살아. 우리 옆집 할머니가 아들 집으로 들어가서 집이 비었어. 세 준대. 저기 파란색 지붕 보이지? 거기야. 마당에 차도 들어가고 앞에 경치도 좋아. 내가 엄마처럼 잘해줄게 와 살어. 응?"
“그럴까요?”
“어! 진짜로 그래! 내가 잘해줄게.”
“그럼 여행 끝나고 생각해볼게요 할머니.”
"응! 진짜로 와! 진짜로 와야 혀!"
할머니가 내 손을 꼭 붙잡고 말하셨다. 할머니 손의 자잘한 주름들이 만져졌다. 그리고 느껴졌다. 고목나무 속에 파인, 아무도 모르는 외로운 구멍을 들여다보는 기분.
“내가 춘천 갔다가 내일 서울에 결혼식 가야 돼. 그것만 아니면 밥 먹고 자고 가라고 할 건데.”
“아니에요 할머니. 이렇게 얘기한 것만으로도 재밌었어요. 아니, 재미졌어요!”
“그래…. 아무튼 재미지겠네…. 히히. 어휴. 이 이쁜 얼굴로 그렇게 다녀.”
제가 예쁘다고요? 그런 말 백 년 만에 처음 들어요. 에이 무슨. 이렇게 예쁜 얼굴로 배낭 메고 그렇게 걸어 다니고….
“아무쪼록 건강하게 잘 다녀. 여행 다하면 전화해야 돼. 전화하고 꼭 놀러 와. 알았지?”
알았어요 할머니. 할머니도 건강하시고, 추석도 잘 보내세요. 우리는 할머니를 정류장에 남겨둔 채 다시 길을 나섰다.
한참을 걷다 차 소리에 뒤를 돌아다봤다. 덩치 큰 농어촌 버스 한 대가 엉덩이를 덜컹대며 우리 앞을 지나쳤다. 버스 차창에 분홍빛이 어렸다. 아, 할매다. 분홍 할매가 버스 창문에 붙어, 우리를 향해 손을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활짝 핀 철쭉처럼, 환하게 웃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