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단하다 이혼할 뻔 21
오월리에서 10km를 걸으니 긴 동굴 같은 터널 다리가 등장했다. 다리를 당장에 무너뜨릴 듯 요란하게 스쳐가는 차들과 함께 한참을 걸으니 터널 밖이다. 눈 앞으로 승용차와 트럭과 버스와 오토바이가 목표물을 발견한 모기처럼 재빠르게 윙-, 하고 지나갔다. 그 끔찍한 굉음과 악몽 너머, 저 건너편으로 보이는, 강가를 따라 난 벽돌색 자전거 도로.
“더스틴, 저기로 걷자! 너무 평화로워 보여. 차가 한 대도 없어.”
“저 길은 춘천 시내로 안 이어지는 거 아냐? 지도 봐봐.”
지도를 봤다. 떨리는 마음으로. 제발 이어져라. 제발 이어져.
“안 이어지는 것 같은데…. 얼마 못 가서 도로랑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잖아. 확실하진 않지만 저 길로 걸으면, 걸은 만큼 다시 되돌아 걸어야 할지도 몰라.”
“그래? …. 아…. 몰라! 저기로 걸을 거야! 더 이상 못 참아! 건너! 건너자고!”
여덟 시간을 차와 함께 걸었다. 분주한 도로 길을 걷는 건 차와 함께 나의 영혼을 빨려 보내는 의식이었다. 한 시간만 더 그렇게 걸었다가는 정말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길을 건넜다. 자전거 도로로 들어섰다. 이 곳은 천국이다. 차가 없다. 자전거도 없다. 사람도 없다. 오른쪽으로는 햇살이 부서지는 맑고 넓은 북한강이 잔잔히 흐른다. 왼쪽으로는, 우리의 지난 고행을 상기시켜 줄 도로가 여태껏 분주하게 달리는 차들에 시달리고 있다. 이 곳은 그렇지 않다. 매연도, 경적도 없다. 우리 앞에는 오로지, 길만 존재한다.
“와아아아아!”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자전거 도로 위를 달렸다. 정신이 나가도록 기뻤으니까. 밤길을 헤매는 고양이처럼 차를 피해 앞뒤를 살필 필요가 없다는 게, 갓길 쪽으로 몸을 바짝 몰아세우다 북한강으로 빠져버릴 염려가 없다는 게.
"어이 수지, 잠깐!"
더스틴이 나를 멈춰 세웠다.
“왜?”
“…. 같이 좀 걷자고. 우리, 이 여행 시작하고 나서 같이 걸은 적 거의 없는 거 알아?”
“그런가."
“같이 걷자고 온 여행인데. 나는 늘 차만 보고, 너는 내 뒤통수만 보고. 일렬로 서서 말 한마디 못하고, 오로지 차만 신경 쓰면서 걸었잖아.”
"그러네. 슬프다. 뭐 이따위니 여행이."
"그러니까 같이 걷자고. 보고 싶었어."
“오? 짜식이….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낄낄댔다. 더스틴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어본다. 뒤에서 구경만 하던 더스틴의 뒤통수. 만져보니 더 예쁘다.
“뭐지 저게.”
저 멀리. 어떤 형체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점처럼 작았던 그것은 크기가 급속도로 불어나더니 제 형태를 드러냈다. 스포츠 자전거다.
"거어서 다이응거에오?”
빠르게 다가오던 자전거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이클 복장으로 빼 입은 남자. 검은 선글라스 아래, 빨간 마스크 안에 갇힌 남자의 두 입술이 웅얼댔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단어들에 마스크가 파르르 떨렸다. 숨을 쉴 때마다 마스크가 오르락내리락.
“네?”
내가 되묻자 남자가 마스크를 벗었다. 드러난 코와 입으로 보아 약 50대 후반.
“걸어서 다니는 거냐고요.”
“아, 네.”
"…. 어디서부터 걸었는데?”
그의 검은 선글라스가 우리를 까맣게 응시했다. 그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헛갈린다. 오늘 걸음을 시작한 지촌리부터 걸었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애초에 걸음을 시작한 철원부터 걸었다고 말해야 하나.
“백마고지요.”
"백마고지? 철원에 있는 백마고지?”
“네.”
“어휴…. 거기부터 걸었으면…. 얼마나 걸렸나?”
“한 일주일쯤 걸렸는데, 중간에 하루 쉬었어요.”
"어디까지 가는데?"
"오늘은 춘천. 최종 목표는 부산."
"어휴. 힘들겠구먼…. 잠은? 비박하나?”
"아무래도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아저씨의 표정은 밥이 거의 다 되어가는 압력밥솥처럼 보글보글하다.
"그래... 도로길 걸으면 힘들진 않고요?"
"힘들어요. 매우."
"배낭은 몇 킬로나 나가요?"
"이 친구 건 24kg. 제건 그의 절반."
"어휴 힘들겠네.”
"힘들어요. 그래서 오늘 춘천 시내 닿으면 거기서 며칠 쉬려고요. …. 혹시 춘천 사세요?”
“응. 내가 춘천 오래 살았지.”
“아 그럼. 혹시 싼 모텔 아는 데 있으세요? 시내 쪽으로요. 이삼일 머물면서 쉴 거라, 시내 중심가 쪽에 있으려고요."
“모텔? 음…. 아!”
아저씨가 자전거에서 내렸다. 자전거를 한쪽에 세우고 길바닥에 쭈그려 앉는다. 앉아봐요. 내가 길 알려줄게. 나와 더스틴도 아저씨 앞에 쭈그려 앉는다. 삼각형 모양으로 모여 앉은 우리 셋. 가운데 땅바닥에 아저씨가 그림을 그렸다.
“이 자전거 길로 쭉 걸으면 공지천이에요. 이 공지천에서 비박해도 될 텐데? 거기 공터 좋은 데가 많아. 나도 예전에 거기서 비박 한 적 있고.”
“아, 아니요. 어제도 비박해서 힘들어요. 춘천은 시내니까 모텔이 많잖아요. 그런 제대로 된 숙소에서 좀 쉬려고요. 숙소가 있을 때 그런 데 묵어야죠. 시내가 아니면 모텔이나 민박 찾는 것도 힘들어서….”
“아…. 아무튼, 공지천에서 자전거 도로를 빠져나가면 경찰서가 보여. 그 뒤에 모텔이 있는데, 거기 가격이 크게 달려있는 걸 본 것 같아. 내가 그 길 자주 지나다니거든. 하도 싸서 기억나.”
“얼만데요?”
“만 오천 원.”
“에, 만 오천 원? 진짜요? 대실 아니고 숙박이?”
“응 숙박이라고 써져있었던 것 같아.”
더스틴, 이 지도 잘 봐. 만 오천 원짜리 모텔로 가는 길이야. 네가 찾아줘야 해. 나는 길 눈이 어두우니까…. 우리는 아저씨가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려놓은 지도를 다시 들여다봤다. 기억해야 해. 오늘만큼은 절대 비박은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지어진 건물 방에서 잘 거야. 작은 화장실이 딸린 침대방을 집이라 부르며, 발가락을 꼼지락대다 잠들 거야. 방값이 정말 만 오천 원이라면 몇 날 며칠 돈 걱정 없이 머물 수 있을 거야.
“그럼, 몸 조심히 잘 걸어요.”
아저씨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검은 선글라스가 다시 한번 우리를 응시했다. 처음 온 식당 메뉴판 보듯 우리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아저씨가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갈게요-. 아저씨가 페달을 밟자마자, 자전가가 순식간에 그를 저 멀리로 데리고 가버렸다. 와 빠르다. 역시 자전거가 빠르긴 빨라. 이 두 다리 따위는…. 느리고 비효율적이란 말이지. 내가 말했다. 가자, 춘천으로. 종일 걷느라 얼얼해진 두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난 그래도, 걸어가는 게 좋아. 더스틴이 말했다. 하긴, 나도 그래. 자전거를 타고 가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어. 난 느린 게 좋아. 비효율적인 것도. 쓸데없는 것도. 생각해보니 이 여행, 우리 적성에 딱 맞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