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단하다 이혼할 뻔 20
“….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도로만 주야장천 걸어야 한다면…. 그건 아니야. 정말 아니야. 그렇다면 경로를 다시 짜야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몰라.”
단어 하나하나에 온점을 찍듯, 더스틴이 힘주어 말했다. 스스스, 뒷골 어딘가로 스산한 무언가가 돋아나더니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아마 새빨개져 있을 고개를 더스틴 쪽으로 획 돌렸다.
“뭘 다시 시작해?”
“여행을.”
“이미 춘천 시내까지 거의 다 왔는데 뭘 다시 시작해? 처음부터 시작해? 서울로 되돌아가자는 말이야?”
“그래야 할지도 모르지.”
“아니, 왜 그래야 하는데?”
“철원에서 여기까지 오는 내내 도로길만 걸었잖아. 계속 그러고 싶어? 난 아냐. 이건 여행도 뭣도 아니야. 위험한 도로길 위를 걸으면서 스트레스받는다는 거 말고는 아무 의미도 경험도 아닌 여행이라고.”
“그렇다고 어떻게 다시 시작해? 지금까지 걸은 건 뭔데?”
“지금까지 걸은 길보다 앞으로 갈 길이 더 많아.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걸을 순 없어.”
“그걸 왜 네가 결정하는데?”
“내가 언제 결정한다고 했어?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내가 반대하면?”
“그럼 나랑 싸우는 거지.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내 의견이 더 존중받는 게 맞아. 너는 내 뒤에서 걷기 때문에 사정이 좀 나을 수 있지만, 나는 앞으로 걸으면서 들이닥치는 차를 먼저 마주해야 한다고. 차 한 대 한대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나는 뭐 차 안 마주해?”
“네 앞으로 차가 갈 때는 운전자가 이미 도로에 사람이 있는 걸 인식한 상태라 좀 나아. 여하튼. 어떻게 계속 이렇게 걸어? 너는 이게 좋아? 좀 더 나은 길을 찾아야 해. 우리가 원했던 여행은 이런 게 아니잖아. 기대했던 거에 100프로 맞출 순 없어도, 어느 정도는 우리가 원했던 여행으로 방향을 틀어야 해.”
“그게 뭔데.”
“도로 길이 아닌 길. 차와 함께 걷는 게 아닌 길.”
“그걸 어떻게 찾아? 걷기 전에 그 길이 좋은지 안 좋은지 어떻게 알아?”
“왜 몰라? 찾아보면 왜 안 나와? 사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도로길을 걷는 것도 네가 귀찮다고 조사에 게을렀기 때문이 커. 안 그래? 한 5분 찾아보고 정보가 없다고 해버리고. 그냥 무작정 이런 길로 와버린 거잖아.”
“뭐? 아니 왜 그게 내 탓이야? 내 조사 방식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으면 네가 조사했으면 됐잖아?”
“왜 또 대화를 그런 식으로 끌어가는데? 내가 지금 누구 탓하자고 그래? 조금 더 나은 길을 찾아보자는 거잖아!”
“아 왜 소리는 질러! 탓은 네가 했잖아! 아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말이 되냐고!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서울로 다시 돌아간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서울로 돌아가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더스틴이 말했다. 아 됐어. 나는 더스틴의 말을 끊어버리고 일어났다. 오덕리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다시 걸어갔다. 강. 나무. 오솔길. 참 좋다. 우리의 여행은 이렇지 않은데. 콧잔등에 방울진 땀을 닦아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니, 참 보람도 없는 땀이다.
“그래서 어떡해. 뭘 어쩌자는 거야.”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몰라.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가만히 내버려둬.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앉아있던 더스틴이 말했다. 정류장 표지판 옆 바닥에 주저앉았다. 길 위로 뻗은 내 두 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짜증내서 미안해. 네가 서울로 다시 가자고 해서 화가 나서 그랬어.”
내가 말했다. 나도 미안해. 스트레스받아서 그래. 더스틴이 말했다.
“다시 시작하자는 네 말 진심이면…. 춘천에 버스 타고 가는 건 어때? 앞으로 남은 20km도 내내 계속 도로길일 거 아니야. 네 말대로 경로를 바꿔서 여행을 다시 시작할 거라면, 스트레스받으면서 도로 길을 걸어가는 대신 빨리 가서 머리 식히고 좀 더 오래 생각해보는 게 낫잖아."
오월리 버스정류장에 주저앉아 있으면 언젠가 버스는 온다. 버스를 타면 춘천 시내까지 30분이면 갈 수 있다. 도로 위에서 끔찍한 차들을 받아내며 서로를 볶고 있을 시간에, 춘천 시내로 가서 즐겁게 닭갈비를 볶고 있을 수 있다.
"…. 아마 그러는 게 좋겠지."
우리의 몸을 덮은 회색 나무 그늘이 바람에 살랑댔다. 버스. 춘천. 나. 우리의 여행. 여행의 시작. 철원에서 시작된 걸음. 목적지는 부산. 까마득했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그래도 시작했고. 춘천까지 왔어. 이제 조금 말이 되는 것도 같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버스…. 지금 버스를 타면, 이제 좀 말이 되기 시작한 우리의 여행이 무너져버리지는 않을까. 다시 일어설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돌멩이 하나를 주워 흙바닥을 긁었다. 아무래도 아쉽긴 하다.
"…. 진짜로 타? 버스?"
더스틴을 슬쩍 쳐다보며, 내가 물었다. 더스틴의 시선은 흙바닥에 고정되어 있다.
"…. 아니."
"…. 그렇지? 그래도 이왕 가는 거, 걸어가야겠지? 춘천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 일단 춘천까지는 걸어가자. 대신 춘천에 가서 좀 오래 쉬는 거야. 찬찬히 살펴보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자."
피식, 웃음이 났다. 미련하고 고집스러운 내 남편.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우리라면, 아무리 칭얼대고 화를 내도 여행을 그만둔다는 말은 안 할 거라는 걸 알아. 다시 시작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이 여행을 끝내고 말 테지. 우리는 미련하고 쓸모없지만, 의외로 멋지니까.
우리는 일어나 서로의 바지에 뭍은 흙과 마른풀을 털어줬다. 묵직한 배낭을 다시 어깨에 걸치고, 샘물을 찾아가는 목마른 짐승처럼 천천히, 어두운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