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노코도를 걷자 10
커피집에서 나와 타바코 상점에 들렀다. 오늘 밤에 또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 먹을 걸 준비해놔야지. 단팥빵과 쿠키, 초콜릿을 하나씩 샀다.
“이게 뭐야?”
길가에는 작은 나무 가판대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올려진 투병한 봉지들.
“귤인데.”
“100엔이라고 쓰여있다. 그냥 돈을 넣고 가져가면 되는 건가 봐. 오….”
100엔을 넣고 귤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디저트까지 완벽히 준비됐다.
“오늘은 혼구까지 걷자!”
내가 외쳤다. 온종일 조금 무리해서 걸으면 오늘 안에 쿠마노의 성지 중 하나인 혼구까지 갈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혼구까지 식당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거다. 하지만 괜찮다. 카페에서 든든하게 아침식사도 했고, 가방에는 간식거리가 들어있다. 저녁은 혼구에 가서 푸짐하게 먹자.
길게 이어진 츠카츠유 마을길을 걸었다. 마을을 뒤덮고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 산 아래 폭 안겨있는 치카노 초등학교. 새빨간 단풍나무 아래 호젓한 가을날의 버스 정류장. 집 앞에 가지런히 널어놓은 무말랭이. 허수아비마저 심히 디테일하게 만들어 놓은 마을 사람들의 정성 어린 솜씨.
마을길은 도로로 이어졌다. 차 한 대가 우리를 지나쳐갔다. 차가 다니긴 다니는구나…. 다가오던 차는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두 다리로 걷고 있는 우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속도를 늦췄다. 그러다 우리 곁을 지나갈 땐 옆 차선으로 살짝 방향을 틀고는 더할 나위 없이 천천히 지나갔다. 우리를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일본 오면 이런 게 좀 감동적이야. 저런 작고 세심한 배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자동차의 뒤꽁무니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맞아. 저런 거 보면 나도 좀 더 세심하고 예의 발라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일본인들의 저런 모습을 보고, 겉과 속이 다르다고 평하기도 해. 일본 사람들은 혼또, 그러니까 본심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다르다고. 근데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들어. 그래서 뭐? 겉과 속이 다르면 뭐? 초면이잖아. 낯선 사람의 본심이 뭐든 그게 그렇게 중요해? 저런 예의바름과 친절을 왜 본심이랑 연결시키는지, 사실 난 잘 이해가 안가. 그럼 뭐, 본심이 욕하고 싶은 거면 막 욕을 퍼부어?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 본심을 드러내는 건 무례한 거지.”
“맞아. 본심이야 어떻든. 예의를 지키면 됐지. 사람들이 다 본심대로 살면 어떻게 되겠어. 누구나 더 빨리 가고 새치기하고 싶은데, 같이 사는 세상이니까 줄을 서는 거 아니야. 핸드폰 볼륨을 한껏 높여 영상을 보고 싶은 게 본심이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 이어폰을 끼는 거고. 타인의 사정을 한번 더 생각해보는 게 몸에 배어 있는 거지 이 사람들은. 존경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해.”
두 시간을 걸어 치카자쿠라 오지에 닿았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는데 더스틴이 웬 낯선 남자와 나란히 앉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마이 와이프.”
더스틴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헬로우, 내가 인사했다.
“쏘리. 마이 잉글리쉬, 베리 배드. (미안해요. 저 영어. 아주 못해요.)”
남자가 말했다. 영어를 못하는 게 왜 미안할 일이지…. 여하튼 못한다니, 나의 일본어 실력을 한껏 발휘해보겠다.
“민슈쿠가 혼또 다카이. (민박이 정말 비싸요)”
나는 몇 개 알지 못하는 일본어 단어를 조합하여 자신감 넘치게 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남자는 내 말을 알아듣고는 (훗!) 고개를 끄덕였다.
“쿠마노코도 지역이 특히 비싼 건가요? 아니면 원래 일본에서는 민슈쿠가 비싼가요?” (이건 문장이 너무 길어 영어로 했다.)
“음…. 에버리지 12,000엔.”
한국돈으로 치면 하룻밤에 약 12만 원. 쿠마노코도 순례길을 걷는 동안 제대로 된 숙소에서 하룻밤이라도 자기는 글렀다.
“왓이즈 유어 플랜 포 투마로. (내일 계획이 뭐예요?)”
남자가 물었다. 플랜? 플랜이라….
“플랜? 노 플랜.”
“….”
“….”
“투마로, 노 플랜? …. 와이?”
남자가 물었다. 그러더니, 아하하하하하하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이곳 사람들은 참 잘도 웃는다. 그렇다면 우리도, 와하하하하하! 웃어버리자. 우리도 모르겠다! 하하하하하! 우리는 왜 계획이 없을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와하하하하하!
“혼구에서 4km. 카와유 캠핑 사이트. 유 워크 투 호시몬 오지. 아이 테이크 유 투 혼구. 위 밋 엣 5. 엣 호시몬 오지. (혼구에서 4km 떨어진 곳에 카와유 캠핑장이라는 곳이 있어요. 호신몬 오지에 오시면, 제가 혼구까지 차 태워 드리고 캠핑장까지도 데려다 드릴게요. 오후 5시에 호시몬 오지에서 만나요.)”
남자가 말했다. 지금까지 한 말 중에 가장 길고 정성 어린 영어 문장으로.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 혼또가 듬뿍 느껴졌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런데 혼구라…. 오늘 혼구까지 걷자고 다짐했지만 어려울 것 같은데. 벌써 정오가 다 되었는데, 5분의 1도 채 못 걸었으니.
“근데 만약 저희가 호신몬 오지까지 못 가면 어쩌죠?”
내가 말했다.
“저한테 전화해요.”
“전화기에 심카드가 없는데.”
하하하하하! 와하하하하하! 남자가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계획도 없고 전화기도 없는 이 이상한 애들은 뭐야! 와하하하하하! 친절은 눈물 나게 고맙다만, 전화기가 없는 관계로 차 얻어 타기는 실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