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은 오늘 밤의 안전한 잠자리, 그뿐인데

쿠마노코도를 걷자 11

by 두지

“아…. 여기부터 자하타 지조라는 곳까지는 우회로로 걸어야 해. 2011년에 지진이 있었는데…. 대지진이어서 산이 쩍 갈라져버렸대. 그래서 순례길 일부가 망가졌고…. 그래서 4km 길이의 우회로가 만들어졌고….”


안내 표지에 자세히 적혀있는 상황설명을 소리 내어 읽어 내렸다. 우회로는 해발 650m의 이와가미 도게 패스를 넘어가는 길이다. 손에 들고 있는 쿠마노코도 안내 지도는 2011년 전에 제작이 되었는지, 지진 전에 나 있던 순례길에 대한 안내가 적혀있다. 야 웃긴다 이거. 내가 말을 이었다.


대지진 때문에 길이 망가져 우회로로 걸어야 한다.


“원래 길은 ‘메-자카’에서 ‘나코도-자야’를 거쳐 ‘오-자카’로 이어지는 길 이래. 여기서 ‘메-자카’는 내리막길로 ‘여자 경사지’라는 뜻이고, 그 길이 ‘나코도-자야’, 그러니까 ‘중매쟁이 찻집’으로 이어지다가, ‘오-자카’, 그러니까 ‘남자 경사지’로 이어진데. 여자는 메-자카에서, 남자는 오-자카에서 걸어오다가 중매쟁이 찻집에서 만나고 그랬었나 보지?”

“순례길인데?”

“순례길이라고 뭐…. 연애하지 말란 법 있나…. 그다음에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아? ‘이와자미 오지’. 우리가 걷는 나카헤치 루트에서 가장 높은 해발 650m 지점이야. 우리가 걸을 우회로는 그 길로 바로 가.”


이와기미 도게 패스를 걸었다. 여자 경사지고 남자 경사지고 다 모르겠고, 오직 가파른 오르막길뿐이다. 야, 저 아래 좀 봐. 앞으로 가던 더스틴이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와…. 풍경이 엄청나네…. 다시 걷는다. 야, 저기 좀 봐. 이번엔 내 차례다. 더스틴이 뒤로 돌았다. 와…. 엄청나다 엄청나. 높은 산 아래로 펼쳐진 풍경에 입을 쩍 벌리고 한참을 서서 헉, 헉, 숨을 고른다. 경치에 입을 쩍 벌리다, 숨이 차올라 헉헉 거리기를 반복하며 이와가미 도게 패스를 올랐다. 그렇게 정상.


이와가미 도게 패스


“하…. 하….”


서늘한 공기 속으로 깊고 거친 숨을 불어넣는다. 잠시 쉬다 가자 어쩌자 하는 말도 필요 없다. 서로의 얼굴 표정을 읽을 필요도 없다. 더스틴과 나는 동시에 배낭을 내려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침에 타바코 상점에서 산 초콜릿을 가방에서 꺼냈다. 조금 부숴 더스틴을 주고 나도 먹었다. 달다. 맛있다. 하지만 부족하다. 우동을 먹어 속이 든든했던 아침에는 이 정도로 점심을 때워도 될 것 같았는데. 어림도 없다. 이와가미 도게 패스를 오른 우리는 이딴 초콜릿이 아닌, 제대로 된 밥이 필요하다.


“피로를 유발하는 기운으로부터 여행자를 보호하는 작은 신 이래.”

내리막길을 걸어 우회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닿았다. 자가타 지조다. 이끼 낀 작은 신상 앞에 서서, 더스틴이 쿠마노코도 지도의 설명을 읽었다. 어디 허기를 달래주는 작은 신은 없니? 내가 말했다. 아침에 먹은 우동의 쫄깃한 면발이 떠올랐다. 있지. 오늘 아 침 우동을 먹었던 치카츠유 커피숍에. 어제 카레와 라면을 먹었던 타키지리 커피숍에. 더스틴이 말했다. 맞네. 맞아. 가자. 신이 내게로 오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가 신에게로 걸어가야지.


신이 내게로 오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가 신에게로 걸어가야지.




푸나타마 진자에 닿았다. 오후 3시다. 목표했던 혼구까지 가려면 앞으로 4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도착하면 저녁 7시다.


“우리가 오늘 그렇게 느리게 걸었나….”


위로 곧게 뻗은 나무 사이를 걸으며 내가 말했다. 오늘 특별히 느리게 걸은 건 아니지. 평소처럼 걸었지. 평소에 좀 많이 느릴 뿐…. 어쨌든, 더스틴이 말을 이었다.


“혼구까지는 못가. 5시만 돼도 해가 지는데…. 어제도 그랬잖아. 언제 빛 같은 게 존재했냐는 듯 갑자기 깜깜해졌잖아. 산길 걷다가 그렇게 깜깜해지면 난감하지….”

“그럼 어디서 자? 어제처럼 가다가 마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다시 걷는다. 미코시 토게 패스에 닿았다. 쿠마노코도 순례길 안내 지도에 화장실, 휴게실, 마실 물, 공중전화 등의 편의시설이 있다고 표시된 곳이다. 화장실도 넓고, 주위도 깔끔하다. 한데 텐트를 칠 만한 숨겨진 구석 자리가 없다.


“아직 해가 좀 남아 있어. 조금 더 가보자.”

내가 말했다. 빛바랜 붉은 단풍잎이 눈송이처럼 소복이 쌓인 흙길을 걷고 또 걸었다. 해가 저버릴까 하는 조바심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두 발 사이에서 젖은 가을 단풍 냄새가 났다. 천년 전 일본 순례객들도 이런 단풍 냄새를 맡으며 걸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걸었을까. 무엇을 소원하며 걸었을까. 우리의 소원은 오늘 밤의 안전한 잠자리, 그뿐인데. 소원과 바람이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해지는 것도 순례의 효능일까.


“화장실이 조금 구식이긴 한데…. 이쯤이면 괜찮은 것 같아. 저기 지붕 뒤에다 텐트 치면 잘 안 보이기도 할 거고….”

더스틴이 말했다. 푸나타마 진자 구역에는 지붕이 딸린 작은 목조 건물이 놓여있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나무배가 있다. 유적인 모양이다.


“30분만 더 가면 호신몬 오지인데…. 거기에는 자판기도 있대.”

지도를 보며 내가 말했다. 자판기가 있다는 건 전기가 들어온다는 뜻 아냐? 화장실 시설도 더 좋지 않을까?

“어쩔래? …. 근데 호신몬 오지까지 기껏 갔는데 여기만 못하면 어떡해. 거기 도착했을 때 즈음에는 분명 해가 져 있을 텐데, 그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시간은 없을 거야.”

“어쩌지….”


고민하는 사이 날이 더 어두워졌다. 그냥 여기 있자. 좋아봤자 얼마나 더 좋겠어. 낙엽 위에 주저앉아 텐트를 꺼냈다.


미코시 토게 패스


저녁 6시. 날이 깜깜하다.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 내부는 바깥보다 한층 더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더스틴의 목소리가 까만 커피에 휘저어 넣은 하얀 우유처럼,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일본 오기 잘한 것 같아. 낯선 곳에 있으니까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돼. 오늘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

“무슨 생각을 했는데?”

“돈.”


대학교 때 베스트바이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 너도 알지? 베스트바이. 전자제품 파는 쇼핑몰. 일도 열심히 했고, 나름 일 잘하는 직원으로 평도 좋았어. 근데 갈수록 그곳에 만연해 있는 생각에 동조할 수 없어서 힘들어지더라고. 그곳에선 모든 게 실적 위주로 돌아갔어. 판매 실적. 고객이 필요한 컴퓨터를 찾아주는 건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었어. 무조건 돈이 많이 남는 컴퓨터를 추천해야 했어. 사양이 높다, 다른 컴퓨터에 비해 가격 대비 성능이 좋다, 따위의 사실이 아닌 말들을 섞어가며. 나중에는 매니저들이 고객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 컴퓨터 액세서리를 슬쩍 끼워 넣으라는 주문까지 하더라고. 그런 세계에 있는 게 무서웠어.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서 한 달 만에 그만뒀어.


“그 사람들은 잊어버린 거야. 돈과 실적이 중요하긴 한데, 거기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까 다른 것들을 잊어버린 거야. 이를테면 정성 같은 거.”


타키지리 카페에서 느꼈던 정성 같은 거? 내가 되물었다. 응. 다시는 오지 않을게 뻔한 우리 같은 외국인 손님에게도 정성을 들이는 마음. 산속 시골마을 작은 카페 이지만, 음식 하나, 서빙하나, 음악 선곡 하나에 정성을 들이는 태도. 그건 타인을 향한 정성이기도 하지만, 자신에 대한 존중이기도 한 것 같아.


“맞아. 나는 그런 걸 자주 잊어버려. …. 오늘 가려고 했던 혼구 있잖아. 대문 개수공사를 몇 년에 한 번씩 하는데, 할 때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통방식을 고집한대. 그러면 재료비도, 인건비도 훨씬 많이 들어가. 근데 그렇게 하는 거야. 왜냐면, 돈이 다가 아니니까. 일본은 그런 걸 가르쳐 주는 것 같아. 내가 하는 일에, 타인에, 그리고 내 인생에, 정성을 들이며 사는 삶.”


속닥속닥. 잦은 이슬비처럼 이야기를 나누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