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서 허기를 달래주는 작은 신을 만났다

쿠마노코도를 걷자 12

by 두지

“수지….”

“응.”

“비와.”

“알아….”

“몇 시야?”

“1시.”


자리 옮길까? 비가 더 세게 쏟아지기 전에 지붕이라도 있는 화장실로 가야지,라는 말을 누군가 꺼내야 하는데. 더스틴도 나도,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피곤하다. 졸리다. 무엇보다, 귀찮다. 괜찮아지겠지. 비야 오다가도 그칠 수 있는 거니…. 까무룩 잠에 들었다가 다시 깼다. 텐트 천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무게가 한층 더 무거워져 있다. 어쩌지…. 언제 깨어있었는지 모를 더스틴이 속삭였다. 어…. 다시 잦아드는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그러다 다시 굵어진다. 그러다 다시 잦아든다. 비가 계속 거세게 온다면 자리를 바로 옮길 텐데. 굵어졌다 잦아들었다 갈피를 못 잡는 빗방울 덕에 우리도 갈팡질팡. 다시 괜찮아지겠지, 하는 희망 반 게으름 반이 섞인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야 씨, 어떡해. 빗물 들어왔어.”

내가 말했다. 핸드폰을 보니…. 4시다. 일어나 봐. 더스틴이 말했다. 침낭 아래 물이 흥건하다. 게으르고 어리석은 우리는 그제야 무거운 몸뚱이를 들고일어났다. 텐트에서 나왔다. 비가 세차게 오고 있다. 텐트 안 짐들을 하나하나 화장실 지붕 아래로 옮겼다. 텐트, 가방, 옷. 다 젖었다. 우리는 늘 이런 식이다.


“추워.”

“나도 추워. 어깨를 이렇게 비벼봐.”

더스틴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샤샤샥, 비벼댔다. 나도 내 두 팔을 그의 팔 사이로 끼워 넣고, 그의 어깨를 감싼 채, 샤샤샥. 이가 달달 떨려왔다. 저녁을 못 먹고 잠에 든 탓에 배 한가운데가 뻥 뚫린 듯, 고통스러운 허기가 느껴졌다. 주위엔 먹을 거는 커녕, 비에 젖은 낙엽들만 잔뜩 쌓여있다. 주인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도는 개의 고통이 이런 걸까. 추운 겨울, 도시 생활을 이겨내는 길고양이들의 고단함이 이런 걸까. 춥다. 배가 고프다. 하지만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다. 비가 어느 정도 잦아들 때까지, 해가 조금 떠오를 때까지, 그래서 다음 마을에 닿을 때까지 이러고 달달 떨고 있을 수밖에. 화장실 입구 앞에 널어놨지만, 전혀 마르지 않는 절망적인 짐들을, 떨어지는 비와 함께 구경하는 수밖에.


비가 와버렸다.


“이제 갈까…. 여기서 계속 이렇게 서있을 순 없잖아. 비가 완전 그치지는 않을 것 같아….”

아침 8시. 세차게 내리던 비는 한풀 꺾이더니 어정쩡하게 내리고 있다. 그래. 호시몬 오지까지만 가보자. 거기는 자판기라도 있다니까…. 내가 말했다. 조금도 마르지 앉은 우비로 몸과 배낭을 감싸고 부슬부슬 비가 떨어지는 오솔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30여분을 걸으니 호시몬 오지다.


우리가 오지에 도착함과 동시에 버스 한 대가 섰다. 버스 문이 열리더니 서른 여명의 서양 관광객이 쏟아져 내려왔다. 우비와 우산으로 완벽하게 무장한 그들의 얼굴은 뽀송뽀송, 조금도 젖어있지 않다. 비가 다시 무겁고 빠르게 떨어졌다. 사람들이 가이드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화장실 쪽으로 가기 위해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가이드가 안내를 시작했다.


“호신몬 오지는 ‘깨우침에의 염원, 그에 대한 일깨움의 문’으로 알려져 있어요. 혼구 타이샤의 신성한 경역, 가장 바깥쪽이죠.”


아-. 와-.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떨어지는 비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비와 안개가 호시몬 오지의 성스러움을 더해주기라도 한다는 듯. 아득한 눈으로 비 오는 오지를 한 바퀴 둘러본 그들이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실은 관광버스가 비 오는 도로 위를 달렸다. 다시, 길 위에는 우리뿐이다.




“어제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어….”

더스틴이 중얼거렸다. 30분을 더 걸어 호시몬 오지에 오지 않고, 푸나타마 진자에 머물렀던 어제의 선택을 말하는 거다. 호시몬 오지의 화장실은, 우리가 밤을 지새웠던 푸나타마 진자의 화장실보다 100배는 더 나은 곳이었다. 먼저, 지붕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90점을 줄 만한데 그에 더해 화장실도 신식이고 깔끔하다. 게다가 세상에, 지붕 아래 널찍한 테이블과 의자도 있다!


젖은 우비를 벗어 나무 난간에 널었다. 신발과 양말도 벗어 널었다. 젖은 양말에서 벗어난 두 발이 개운하다가, 이내 시리다.


젖은 우비를 벗어 나무 난간에 널었다.


“더스틴, 나 배고파.”

“나도.”

“자판기에 배가 찰만한 음료수가 있을까.”

“글쎄….”

“또 비 많이 온다.”

“응.”

“자판기는 저쪽에 있는데…. 빗속을 뚫고 1분을 달려서 저기까지 가야 하는데. 고작 캔음료 하나 뽑겠다고 그런 짓을 하는 게 과연 가치 있는 행위일까?”

“글쎄…. 주먹밥이 있다면 비가 폭풍우처럼 쏟아지던 말던 비명을 지르며 자판기로 내달려갈 텐데.”

“힝…. 배고파….”


비가 조금 잦아든 것 같다. 못 참겠어. 나, 다녀올게. 벌떡 일어나 우비를 뒤집어썼다. 꺄하-. 자판기로 내달려간다. 헉헉, 헉헉, 헉헉. 금방일 줄 알았는데 한참을 뛰고 있다 그렇게 자판기 앞. 포카리스웨트를 뽑았다. 그리고…. 포도젤리. 다시 헉헉, 헉헉, 헉헉. 야, 마시자. 더스틴에게 음료를 내밀었다. 음료 두 캔을 반씩 나눠마셨다. 배 한가운데 뚫려버린 허기의 구멍이 밥을 향한 그리움 마냥 커져버려 고통스러운 가운데, 음료 따위로 배를 채우려니 서럽다. 서러운 와중에 맛은 꽤 있다. 특히, 그나마 씹을 거리가 있는 이 포도젤리 음료.


“배고파.”

“응. 너 배고픈 거 잘 알고 있어. 벌써 100번도 넘게 말했는걸.”


머릿속은 한 단어로 꽉 차 있다. 배고파. 머릿속이 그러니 입 밖으로 나오는 말도 그뿐이다. 배고파. 또 뭐 씹을 거리가 없을까. 다시 자판기 탐방에 나섰다. 이제 비 따위 신경도 안 쓰인다. 이건 뭐지. 단팥죽인가…? 일본 자판기에는 별걸 다 판다더니, 캔 단팥죽도 있군. 음….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캔이지만…. 먹을만하지 않을까. 팥이라면 꽤나 든든할 텐데. 설마…. 따뜻하기까지 한 거 아냐? 돈을 집어넣고, 조심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투루룩. 캔 하나가 묵직하게 떨어졌다. 자판기 구멍으로 손을 넣었다. 아…. 따뜻해…. 따뜻해…! 일본 자판기 만세!


“더스틴 이거 봐. 따뜻한 단팥죽 음료야. 감동이지 않니? 만져봐.”

“와…. 따뜻해…. 어제 네가 말한, 허기를 달래주는 작은 신이 여기 있었네.”


따뜻한 단팥죽 캔음료


따뜻한 단팥죽 캔을 나눠마셨다. 몸에 온기가 돌았다. 아침 9시다. 호시몬 진자 화장실에 머문 지 한 시간이 되었다. 양말은 한 시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푹 젖어있다. 이제 그만 가자. 비는 안 그칠 것 같고, 더 기다려봐야 짐이 마르지도 않을 것 같아.


“못 걸을 정도는 아니네.”

호신몬 마을길을 걸으며, 더스틴이 말했다. 비는 부슬부슬 내렸다. 비가 오는데도 마을길을 걷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날이 맑은 어제와 그제는 길에서 하루에 두세명 볼까 말까였는데.


“여기 길이 그러게 예쁘다고, 쿠마노코도 안내지도에 쓰여 있었어. 호신몬 오지에서 혼구 타이샤까지 이어지는 산책길이 ‘엑설런트’하다고.”

더스틴이 말했다. 엑설런트라고? 엑설런트라는 단어로는 전혀 표현이 안 되는 길인데? 내가 말했다. 몽상 같은 길이다. 구름 같은 길이다. 안개가 걷혀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으면 하다가도, 안개가 걷히지 않았으면 하다가도. 화창한 모습, 우중충한 모습, 눈 쌓인 모습, 폭풍우에 감긴 모습, 다 보고 싶은 산책길이다.





무인가게가 보였다. 100엔짜리 귤 봉지, 200엔짜리 말린 고구마 봉지가 얌전한 아기 고양이처럼 앉아있다. 말린 고구마라니! 고구마가 10개쯤 넉넉하게 든 봉지를 집어 들고, 200엔을 돈 상자에 넣었다.


“맛있어.”

“진짜 맛있어.”

“아까 네가 자판기에서 뽑아온 포도젤리나 캔 단팥죽도 맛있었는데, 이건 그거랑 비교도 할 수 없이 맛있어.”

“어.”

음식을 씹겠다고 오랜만에 턱을 움직이고 있자니 신명이 난다. 한참을 서서 고구마를 우걱대는데 한 아주머니가 우리를 보고 다가온다.


“#@$#%?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는 정확하게 이해했다. 무인가게에서 말린 고구마 사셨군요? 아유 감사합니다 감사해! 일본어가 짧아서 아쉽다. 심장을 꺼내서라도 우리의 혼또를 보여주고 싶은데. 고맙긴요 아주머니. 저희가 천배 만 배는 더 고맙습니다. 아사 직전이었던 저희를 구해주셔서 말이죠. 그것도 이렇게 맛있는 말린 고구마로.


무인가게의 귤과 말린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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