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죽도록 고마운 순간이다

쿠마노코도를 걷자 13

by 두지

마을길을 따라, 차밭을 지나, 빽빽한 나무 숲을 거슬러 두 시간을 걸으니 혼구 타이샤.


혼구 타이샤는 갈색 지붕을 단 커다란 절이었다. 절에는 사람이 많았다. 비가 와도 사람들은 여행을 한다. 산길을 안 걸을 뿐이지…. 비 오는 산길에서 짐이 홀딱 젖을 때까지 버티다 밤새 오들오들 떨고 있지 않을 뿐이지…. 비 때문인지 안개 때문인지 카메라에 습기가 차 버렸다. 무엇을 찍든 화면이 흐릿하고 뿌옇다. 내 시야도 점점 흐릿해진다. 지칠 만도 하지. 비 때문에 새벽 한 시에 잠에서 깨서, 밤새 떨다 3시간가량을 걸었으니.


“너, 혼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야.”

절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온 더스틴이 땅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나를 기웃거리며 말했다. 응, 그럴 거야 아마. 너무 피곤해서 혼이 쏙 나가버렸거든.


“벌써 2시다….”

“수지, 어제저녁에 세운 계획은 철수해야겠다.”

“어제저녁에 세운 계획이 뭐지? 아무 생각도 안 나.”

“푸나타마 진자에서 두 시간 거리인 여기 혼구까지 술렁술렁 걸은 다음에…. 편의시설이나 식당 같은 게 있는 이 곳 혼구에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쉰 다음, 느지막이 카와유 캠핑장으로 가서 텐트를 치기로 했었잖아. 근데 이렇게 밤새, 그리고 오전 내내 비가 올 줄은 몰랐지."

“캠핑장에 간다고 캠핑이나 할 수 있겠어? 이렇게 비도 오고…. 짐도 다 젖고….”

“그럼, 민슈쿠로 가?”

“민슈쿠는 너무 비싸.”

“그럼, 캠핑장으로 가?”

“짐이 다 젖었는데…. 감기 걸릴지도 몰라.”


그럼 어쩌자는 건가 난. 가뜩이나 히마리 없던 해가 점점 저물어가고 있었다. 일단, 관광안내소로 가보자. 내가 말했다. 관광안내소에 간다고 해서 우리의 오늘 밤 계획을 안내받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만. 5분 정도 걸으니 관광안내소다. 이건 뭐…. 관광안내소를 이렇게까지 잘 지어놓을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좋다. 관광안내소가 아니라 관광의 집, 관광의 대궁전이라고 불려도 될 수준의 크고 세련된 건물이다.


“어떻게 할래.”

관광안내소 앞에서 다시 주저앉아버린 나에게, 더스틴이 물었다. 젖은 텐트랑 침낭 안에 들어가서 자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게다가 오늘 새벽부터 지금까지 계속 고단했는데…. 내가 중얼거렸다. 나는 체력이 강하다. 쓸데없는 데(예를 들면 규칙적인 운동이라던가….) 힘을 안 써서 그런지 잘 지치지도 않는다. 근데 오늘은 지친다. 쉬어야겠다는 강한 생각이 든다. 잘 때 조금 불편하고 추운 거야 견딜 수 있지만, 아프기라도 하면 나중이 곤란해진다.


“그리고 사흘 내내 춥고 불편하게 잤잖아. 아무리 너랑 나라도, 이쯤이면 한 번 쉬어줘야지.”

더스틴이 나를 거들었다. 맞아. 오늘 같은 날에는 좀, 잘 건조되고 따뜻한 공간에서 푹 쉬어줘야 해. 그래야 몸에 무리가 안 갈 거야. 더스틴과 나는 우리의 의견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허구의 인물과 싸우기라도 하듯, 똘똘 뭉쳐 서로에게 깊게 동조했다. 그래, 가는 거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유노미네 온센으로. 가서 쉬자.


안내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스미마셍…. 카운터로 가 입을 떼자 직원이 고개를 꾸벅, 하고는 다른 직원을 데리고 왔다. 영어가 되는 직원인가 보다. 다행이다. 할 질문이 백만 개 있는데.


“유노미네 온센이 여기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인가요?”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나요? 버스 가격은? 시간표는? 2명이 잘 건데 민슈쿠 가격대가 얼마나 되나요? 민슈쿠 예약은 가능한가요? 전화를 걸어서 예약을 걸어줄 수 있나요? 추천 민슈쿠가 있나요?


끝없이 쏟아지는 우리의 질문에 직원은 하나하나, 차례차례, 상냥하게 대답해줬다. 유노미네 온센 마을까지는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리는데, 날이 곧 어두워질 거라 걸어가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버스는 4시 58분에 있는데, 안내소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민슈쿠 중 가장 저렴한 곳은…. 인당 3,800엔이다. 아침식사를 추가하면 가격인 두배 정도로 뛴다. 전화 예약 가능하다. 전화로 예약을 도와주겠다.


“어떻게 할래. 하룻밤 자는 데 우리 둘이서 8만 원 정도야.”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안내소 구석으로 가 긴급회의를 했다. 어쩌지? 어쩔까? 어떡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어쩌냐고 서로를 추궁하던 우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오케이야. 더스틴이 다시 입을 뗐다. 아니 왜 내가 원한다면이야. 네가 좀 결정해….


“에잇! 가자. 가버리자! 8만 원 까짓 거 써버려!”

내가 외쳤다.

“오 정말? 맞아! 어쩔 수 없어 이런 날은. 하룻밤에 8만 원을 써야 하는 오늘 같은 날도 있는 거야.”

“그래! 8만 원 쓴다고 죽기야 하겠냐고!”


오늘 밤 따뜻하고 마른 방에서 쉬지 않는다면, 젖은 상태의 짐을 하룻밤 더 축축하게 묵혀 둔다면, 다음 여정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쿠마노코도를 위해, 오늘 하룻밤을 투자하기로, 우리는 죽을 각오를 한 독립투사처럼 주먹을 꾹 쥐었다.


“예약해주세요! 이 민슈쿠(가장 싼 3800엔짜리)로요!”

다시 안내 데스크로 가 호기롭게 외쳤다. 직원이 민슈쿠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안 받네요….”

“아? 아 그럼…. 이 민슈쿠는요?”

두 번째 민슈쿠로 전화를 걸었다. 방이 다 찼다네요. 직원이 말했다. 그럼 그다음. 또 방이 없다. 어쩌나. 민슈쿠에서 잠을 잘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비싼 민슈쿠 중 어디 한 군데라도 제발 우리를 받아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직원은 불평 한마디 없이, 귀찮아하는 기색 조금도 없이, 리스트에 나온 민슈쿠 모두에 전화를 걸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전화한 곳은 ‘마루네’.


“좀 전에 취소가 들어와서, 방이 딱 하나 남았대요. 예약하시겠어요?”

“아…. 거기는 얼마인가요?”

내가 물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 했다. 대답을 들어야 했다.

“1인당 4650엔입니다.”

옘병할. 8만 원짜리 방에 묵겠다는 것도 힘든 결정이었는데 10만 원이라니…. 어쩔 수 없잖아. 이제 와서 캠핑을 할 수도 없고. 그리고 예약 도와주신다고 이렇게까지 수고해주셨는데…. 더스틴이 말했다. 예약, 할게요. 울고 싶은 마음 반, 방을 구해 다행인 마음 반을 담아, 내가 말했다.


“버스 타고 가시려면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4시 58분에 이 앞에서 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짐을 주섬주섬 챙겨 안내소를 나왔다. 버스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남아있다. 우리는 안내소 옆에 있는 오토리를 보러 갔다.


“세계에서 제일 큰 토리래.”


토리를 올려다보는 내 뒤통수에 대고, 더스틴이 말했다. 그런 건 또 언제 공부했데…. 높이 33.9미터, 너비 42미터, 무게 172톤. 세속적인 세계와 성스러운 세계를 나누는 문이다. 우리는 나란히 문을 넘었다. 문을 넘자 배가 고파졌다.


“도시락을 사 가자. 민슈쿠 가이세키는 너무 비싸서 못 먹지만, 뭐라도 먹고 자야지.”

내가 말했다.

“진작 살걸 그랬네. 버스 시간까지 10분 남았어.”

“아까 슬쩍 봤는데, 버스가 한 30분 간격으로 있는 것 같던데? 다음 버스 타면 되지.”


동네를 돌아다니다 발견한 벤또 가게에서 먹음직스럽고 실한 벤또 두 개를 샀다. 편의점에 들러 맥주도 세 캔. 비실비실 미소가 번져 나왔다. 뜨거운 물로 사우나를 하고 잘 마른 몸을 이불 위에 풀어놓은 후, 벤또를 안주삼아 차가운 맥주 한 캔을 캬아!


삼십 분 안으로 찾아올 행복을 예상하며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안내소 앞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4시 58분 버스 다음 스케줄이….


“아 뭐야!”

“7시?”

“아니, 3시 30분, 4시, 4시 30분, 5시. 이렇게 30분 간격으로 있다가 왜 갑자기 우리가 타려고 했던 시간에만 7시로 껑충 뛰어?”

“그건…. 우리 인생은 늘 그런 식이니까.”

더스틴이 말했다. 안돼…. 2시간이나 더 기다릴 순 없어…. 이렇게 춥고 배고프고 지치고 젖은 상태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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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7시에 있었다


“에?”


절망하는 우리 앞에 민슈쿠 예약을 도와준 직원이 짠, 등장했다. 그녀가 우리를 의문의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니 민슈쿠 예약 다 해주고 버스 시간까지 알려줬는데, 4시 58분 버스를 타겠다고 자신 있게 외치고 나가더니 왜 지금 이 시간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죠?, 라는 표정으로.


“엄…. 캔 위 워크 데어? (민슈쿠까지 걸어갈 수 있나요?)”

맥주캔을 담은 비닐봉지를 만지작거리며 내가 말했다. 거 참, 되게 멋쩍네.

“에에에에에? 노! 노! 아이 콜 마루네. (아니요! 제가 마루네에 전화를 해드릴게요.)”


아무리 무모하다지만 해 다 진 어둠 속에서 산길을 걷겠다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여전히 거두지 않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여직원이 전화를 걸기 위해 안내소로 들어갔다.


“마루네 윌 컴 히어 (마루네에서 이쪽으로 오겠대요.)”


다시 등장한 직원이 우리에게 통보했다. 오겠다고? 우리를 픽업하러? 휴.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씩, 미소를 지었다. 더스틴과 나의 얼굴은 어쩔 줄 모른 채 일그러졌다. 바보. 우리는 바보다. 왜 버스 시간 하나 맞추지 못해 여러 사람을 괴롭히는가? 손수 전화를 돌려 예약해주고, 버스 시간 알려주고, 민슈쿠에 우리가 몇 시에 갈 테니 잘 받아주라고 부탁까지 해준 직원 성의를 생각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4시 58분 버스를 탔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우리 때문에 민슈쿠에 괜한 부탁을 한 여직원에게도, 귀찮게 우리를 데리러 와야 하는 마루네에게도.


“아, 고멘네사이. 고멘네사이. 요로시꾸, 어쩌고 저쩌고.”


10분 후 검정 세단 한 대가 도착했다. 아저씨 한 분이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관광안내소 직원이 양 손을 모으고 몸을 굽신거리며 고멘나사이(죄송하다)와 아리가또고자이마스(감사하다)를 무한 반복했다. 마치 학교에서 말썽을 부린 아이(더스틴과 나)의 엄마 마냥…. 우리 자신이 죽도록 싫은 동시에, 우리 외의 모든 타인이 죽도록 고마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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