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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Apr 21. 2019

해발고도 4,000m, 남편이 사라졌다

“저게 그 동굴이야? 밀라레파?” 


내가 물었다. 산 중턱에 심심한 구멍 하나가 있긴 한데, 이 험한 산길을 고작 저 구멍을 보기 위해 걸어왔다고 하기엔…. 티베트 승려들이 기도를 드리는 기도굴이라는데, 오늘은 기도드리는 날이 아닌지 조용하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주위 풍경은 휑하다. 눈을 들어 위를 보니 웅장한 설산들이 병풍처럼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와, 진짜 멋있다…. 하얀 설산과 휑한 들판이라니. 묘하고 신비해. 여기 무슨 영화 혹성탈출에 나오는 데 같아. 아니, 혹성탈출에는 저런 설산이 없나? 그런데 다들 어디 갔지? 이 널따란 풍경 위에 생명 체라곤 우리 둘 뿐이야.  



“저 설산이 안나푸르나 3봉인가 봐. 이거 봐.” 


동굴 주위를 기웃거리던 더스틴이 표지판을 발견했다. ‘안나푸르나 3봉 베이 스캠프’라고 써진 표지판이 설산 방향으로 세워져 있었다. 안나푸르나 3봉 베이스캠프라면 나왈에서 봤던 그 눈부신 봉우리다. 여기에서 이어지는구나. 


“조금 더 올라가 보자.” 

더스틴이 말했다. 어딜? 내가 물었다. 안나푸르나 3봉 베이스캠프. 뭐? 미쳤어?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는데? 아니 넌 무슨 표지판만 나오면 무조건 가쟤. 베이스캠프가 있다고 하면 아, 그런가 보다 하면 되지, 뭘 가긴 또 가? 너 나왈에서도 그랬잖아. 위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면서, 올라갔다가 온다고 그 높은 곳을 한참이나 올라갔잖아. 아니 왜 그러는데? 뭐에 씌웠어? …. 


베이스캠프가 있다잖아. 더스틴이 말했다. 가보고 싶지 않아 넌? 아니 전혀. 내가 말했다. 야 생각을 해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도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리는 코스인데, 3봉 베이스캠프는 얼마나 걸릴지 누가 알아? 게다가 우리 해 지기 전에 마낭에 가야 해. 아까 그 미친 벼랑길로 되돌아갈 생각만으로도 걱정이 태산인데 베이스캠프라니! 



“그럼 저기 빙하까지만 갈래. 바로 앞에 있잖아. 가까워 보이지 않아? 만져보고 싶어. 저렇게 투명한 파란색은 본 적이 없어.” 


더스틴은 제 투명한 파란색 눈을 들어 빙하를 바라봤다. 하나도 안 가까워 보이는데…. 못 미더웠지만 일단 더스틴을 따라 길을 걸었다. 아니 이건 ‘길’이라고 하기엔…. 체감 경사 약 45도의 언덕에는 딱히 길이 없었다. 잔뜩 깔린 자갈 사이에 발을 꽂을 수 있을 뿐…. 여기로 가는 게 맞아? 더스틴 뒤통수에 대고 내가 물었다. …. 뭐? 안 들려. …. 더스틴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계속 위로 올라갔다.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이 정말 여기가 맞다면, 트레커들이 한두 명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니야? …. 더스틴이 뒤로 돌아 뭐라고 외쳤다. 그의 말들은 강한 바람에 어디론가 휩쓸려가 버렸다. 뭐라고 하는 거야. 저 미친놈. 빙하에 홀딱 홀려서. 


“야!” 

푸른 빙하에 사로잡혀 돌무더기를 마구 오르는 더스틴을 잡아 세웠다. 


“어.” 

“난 그만 갈 거야.” 

“그럼 넌 여기서 기다려.” 

“…. 너도 그만 가! 어디까지 가려고 그래? 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불안해. 봐봐. 주위에 아무도 없잖아. 우리 같은 평범한 트레커가 걷는 길이 아닌 것 같아."  

“봐봐. 빙하가 정말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아.” 

“바로 앞에 보인다고 정말 앞에 있는 줄 아냐? 너 원근법도 몰라? 그럼 우리 방 앞에 있는 설산도 지척에 있냐고. 어느 정도나 되는 길인지도 모르면서.” 

“조금만 올라가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아. 바로 앞까지만 가볼래.” 

“…. 아 몰라 맘대로 해. 나왈 뷰포인트 때처럼 오래 있다 오면 여기서 굴려버린다.” 

 

더스틴은 내 등을 툭 치더니 힘차게 위를 향해 올라갔다. 포카라에서 산 사이즈 큰 싸구려 잠바를 입은 하늘색 뒷모습. 길 같지도 않은 길을 따라 점점 크기가 줄어들더니, 이내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대체 왜 가는 걸까? 길 아닌 길.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알 수 없는 길. 안나푸르나의 커다란 설산 봉우리에 홀린 듯 끌려 올라가는 저 남자. 조금 걷다 포기하고 오겠지. 흥, 아무리 걸어봐라 빙하가 나오나. 곧 돌아올 거야. …. 10분이 지났다. 신나게 들썩이며 사라져 간 더스틴의 등쌀을 떠올려봤다. 그 등쌀, 이쯤이면 다시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20 분이 지났다. 곧 오겠지. 곧 올 거야. 

 

강한 바람에 머리칼이 들썩였다. 자갈이 언덕 아래로 후드득 굴러 떨어졌다. 경사길에 무릎을 모으고 얌전히 앉았다. 가만히 보니, 자갈 사이에 까만 개미들이 꽤 많이 기어 다니고 있다. 이 황량한 산길에 생명체가 우리만 있는 건 아니었네. 나는 잠자코 개미들의 행렬을 지켜봤다. 죽은 벌레를 떠메고 가는 개미가 내 왼발에서 오른발까지 기어갈 때까지. 또 다른 개미가 내 오른발에서 왼발로 기어갈 때까지. 개미의 행렬을 한참 바라보다, 굴러 떨어지는 자갈의 여행을 지켜보다, 산 아래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다…. 멍청해. 멍청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무력하게 앉아있는 게. 


영원 같은 30분이 지났다. 이쯤이면 기별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가파른 경사길 너머를 고개가 빠지게 올려봤다. 파란 하늘뿐, 더스틴이 입은 파란 잠바 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눈이 저렇게 쌓여있는데. 넘어졌나. 눈이 잔뜩 쌓인 길을 걷다 미끄러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까 같은 벼랑길을 걷다가 발을 잘못 디딘 거 아냐? 눈사태라도 났나? 설마…. 어디 굴러 떨어졌거나 눈 속에 갇혀 버렸는데, 나는 까맣게 모르고 구조에 필요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며 여기서 멍청하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넘어졌나, 떨어졌나, 갇혔나, 죽었나. 작은 눈송이처럼 머릿속에 사뿐히 내려앉은 걱정의 조각들이 자기들끼리 덕지덕지 엉겨 붙어, 산을 빠르게 굴러 내려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렸다. 이러고 있어선 안 된다. 올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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