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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Apr 28. 2019

히말라야의 파란 잠바를 찾아서

바람이 불었다. 세차게. 경사는 점점 심해졌다. 대충 깔린 자갈에 발을 힘껏 꽂아 넣었다. 세찬 바람과 심한 경사 탓에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들 지경이다. 이제 그만 내려가고 싶은데…. 이 자식은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럴 사람이 아닌데.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안 올 사람이. 나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을 싫어하는 만큼, 내가 자신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내가 30분 넘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을 테다. 게다가 가기 전부터 위험할 거라고 내가 말리지 않았나. 조금만 갔다가 금방 내려오라고 한 내 말도 기억하고 있을 거다. 


겁이 난다. 더스틴의 의지와는 달리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부닥쳐 있을까 봐. 머릿속으로 온갖 불운의 장면들이 다시 한번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잘못될 수 있을 경우의 수와 며칠 전 읽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사람 이 죽어 나가던 소설의 줄거리가 뒤엉켰다. 정말 잘못됐으면 어떡하지? 난 뭘 해야 하는 거지?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어디로 가서 어떻게, 누구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 거지? 브라가까지 가야 해? 한 시간은 넘게 걸릴 텐데. 그땐 너무 늦는 게 아닐까? 브라가까지 가려면 그 벼랑길을 혼자 건너야 하는데…. 



“더스틴!” 

발이 묶여버렸다. 경사가 너무 심해 더는 오를 수 없었다. 나는 오르지도, 그렇다고 다시 내려가지도 못하고 발목을 45도로 꺾은 채 저 멀리 안나푸르나 3 봉의 푸른 빙하를 바라봤다. 더스틴! 더스틴! 아무리 외쳐도, 더스틴은 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응답하지 않는다. 


“더스틴! 더스티이이이인!” 

그러게 가지 말라니까! 어딘지도 모르는 길 따위 가지 말라니까. 우라질 놈. 내 피를 말리는 놈. 더스틴! 야이씨 더스틴! 배 안에 고여 있던 걱정이 외침과 함께 복받쳐 나와 눈물로 쏟아져 내렸다. 불어오는 바람이 눈물을 잽싸게 말려 버렸다. 이제 어떡하나. 나는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한 채 더스틴의 이름을 하염없이 부르다, 바람이 눈물을 말려주면 다시 엉엉 울기를 반복했다. 


산장에서 얌전히 쉬었어야 한다

“여어-!” 

…? 사람이다! 


“길 잃었어요오오?” 

50m 너머, 네팔 가이드와 함께 산을 오르는 50대 초반 무렵의 서양 남자 트레커가 나에게 외쳤다. 


“아니요! …. 혹시! 베이스캠프 가시나요!” 

“네!” 

오 신이시여. 이 길이 정말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가이드가 길을 모를 리는 없으니. 


“올라가시다가!” 

휭-.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나와 그들 사이의 대화를 방해했다. 나는 두 손을 입 양쪽에 오므리고, 온몸이 부서져라 크게 외쳤다. 


“파란 잠바!” 

“….” 

“파란 잠바 입은! 남자! 보이면!” 

“네!” 

“수지! 수지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 좀! 해주세요!” 

“이름이! 뭐라고요!” 

“수지!” 

“수지! …. 그 사람! 이름! 뭔가요!” 

“더스티이이인!” 

“더스티이이인! 알았어요오오오! 수지이이이!” 


흑.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저씨가 만나게 될 더스틴이 제발 곤경에 처한 더스틴이 아니길. 어딘가에 고꾸라진 더스틴도, 다리가 부러진 더스틴도 아닌, 그저 빙하에 홀려 나 따위는 잊은 채 정처 없이 걷고 있는 더스틴이길. 


칼 같은 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경사진 고갯길을 쳐다보느라 아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다시 들어 올리기를 열 번 정도 반복했다. 천천히 걸어가던 트레커와 가이드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걸까. 트레커가 저 빙하까지 닿는데 걸릴 시간 최소 30분…. 더스틴을 찾는 데 걸릴 시간 20분. 그리고 더스틴이 다시 여기까지 내려오는 데 걸릴 시간 30분…. 


그 트레커가 더스틴을 찾을 수는 있을까? 만나지 못하면? 만나지 못했다고 나에게 말해주기 위해 다시 내려오지는 않을 거 아냐. 난 언제까지 여기에 이러고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지?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서 이 길을 올라가 볼까. 바보. 용기를 내려면 아까 냈어야 해. 가이드와 트레커를 따라 쫓아 올라갔어야 해. 


산장에서 얌전히 쉴 것이지 왜 사이드 트랙은 가겠다고 설쳐서. 안나푸르나 사이드 트랙이 무슨 식당 가서 돈 몇 푼 주고 주문하는 간단한 사이드 디쉬야? 아니지. 안나푸르나 사이드 트랙이란 건 반나절, 종일, 혹은 2박 3일을 계획해서 걸어야 하는, 중간중간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트레킹이지. 아침에 멍하니 밀크티를 마시다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서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지. 만약 그랬다간, 태풍 같은 바람이 부는 경사길에 꼼짝없이 갇혀 대체 어디서 고꾸라져 있을지 모르는 남편 놈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나 같은 처지가 되기 십상이지.  


칼 같은 바람이 얼굴을 후려친다. 그는 저 눈길 너머, 어디에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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