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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May 05. 2019

히말라야에서 살아남기

20분이 더 지났다. 파란 잠바의 흔적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경사길 위로 고개를 바짝 쳐들고 더스틴의 흔적을 찾는 것도 지쳐 포기했다. 나는 돌무더기 위에 걸터앉았다. 나쁜 상상을 자제하려 애쓰는 동시에, 만약의 경우 혼자 걸어 내려가야 할 안나푸르나에 대해 생각해봤다. 쏘롱 라는 혼자 어떻게 넘어가지…. 쏘롱 라를 혼자 넘는 건 아무래도 무리니,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나.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가야 하나. 그것도 무서운데. 옆에 있으니 그냥 있구나 싶던 더스틴이다. 아니, 그제 심하게 싸웠을 땐 차라리 혼자 걸으면 편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니다. 없으니 불안해서 미쳐버리겠다. 그런데 나 되게 못됐다. 이 상황에서 더스틴의 안위가 아닌, 내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니. 


저 너머 어디에 있는걸까


“수지!” 

…! 더스틴! 후진 하늘색 잠바. 그렇게 깎으라고 잔소리해도 안 깎는 덥수룩 한 수염! 


“야! 야아아아아아아아아!” 

바람을 가르기 위해 죽어라, 소리를 질렀다. 선글라스를 낀 더스틴의 표정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더스틴은 대나무 작대기를 질질 끌며, 뒤에서 누가 쫓아라도 오듯 경사진 언덕길을 거의 뛰다시피 내려왔다. 


“뭐야!” 

차갑게 식은 파란 잠바가 내 앞에 도착했다. 추위 때문인지, 뛰어오느라 받은 열 때문인지 그의 볼은 분홍색으로 물들어있다. 


“뭐냐고!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거 알아, 몰라!” 

“미안해, 미안.” 

숨을 헐떡이며, 더스틴이 말했다. 


“이 나쁜 새끼! 죽여 버릴 거야! 또 그래 봐 정말 죽여 버릴 거라고!” 

주먹을 불끈 쥐고 파란 등짝을 마구 후려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깊은 걱정은 강한 분노로 돌변했다. 분노로 눈물이 솟구쳤다. 


“기다리는 줄 당연히 알았지.” 
“기다리는 줄 알면 왜 이제와으어아어어엉!” 

저리 비켜! 엉엉 우는 나를 끌어안으려는 더스틴의 양팔을 후려쳤다. 아니 뭐 하다 이제 오는데! 내가 무슨 생각까지 한 줄 아느냐고! 


“네가 걱정할 줄 알고 그만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정말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빙하가 손에 잡힐 것 같은 거야. 정말 조금만 가면 닿을 수 있었는데….” 

“뭐야 지금? 더 갈 수 있었는데 나 때문에 돌아왔다, 이거야? 그래서 원망스럽다 이거야?” 

“그런 건 아니고. 그런데 정말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았는데…. 어떤 독일 아저씨가 내 이름을 시끄럽게 부르더라고. 네가 나 찾아달라고 했다며?” 

“아저씨가 뭐랬는데.” 

“수지라는 애가 더스틴을 애타게 찾고 있으니까 빨리 내려가 보래.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시끄러워 죽겠다고.” 

아니 이 아저씨가…. 남은 속이 타 죽겠는데 놀려대기나 하고…. 정말, 정말로 고맙긴 하다만 말이다. 


더스틴이 본 풍경. 이걸 '풍경'이라고 해도 되나.




마낭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려갔다. 쉬엄쉬엄 다녀오려던 험한 벼랑 길을 오르다, 더스틴의 이름을 하염없이 외치다, 돌아온 그를 부여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울고불고하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다. 숲 속을 가로질러, 죽음의 벼랑길을 건너고 건너, 황량한 들판으로 내려갔다. 저 멀리 선 설산 위로 핑크빛 해가 물들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방으로 갔다. 해가 떠난 자리에는 남빛 하늘만 남아 창문을 꼬박 채우고 있었다. 낮에 서 있던 하얀 설산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차가운 남빛을 조금 머금은 설산. 그 위로 펼쳐진 남색 하늘에, 수많은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박혀 있다. 아름답다. 그리고 두렵다. 오늘 경험한 안나푸르나는 아름답지만은 않았어. 


조금 더 조심하자, 생각했다. 조금 더 두려워하자, 다짐했다. 우린 아주 자그마한 인간일 뿐이다. 잘못 디딘 한걸음에, 잠깐 미끄러져 내려온 눈에 치어 허망하게 죽어버릴 수도 있다. 나는 더스틴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내가 사라진다…. 더스틴이 사라진다…. 어떤 의미일지 가늠해볼 수도 없는 일이, 이 산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걸 오늘에야 알았다. 더스틴과 함께 이 산을 오르는 게 기대했던 만큼 다정하고 애틋하진 않지만, 그런 건 이제 상관없다. 이 산을 무사히 오르고 내려가는 것.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 조금도 다치지 말고 산을 무사히 오르자. 당분간은 그것만 생각하자. 


우리, 조금도 다치지 말고 산을 무사히 오르자. 당분간은 그것만 생각하자.





20화를 끝으로 '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위클리 매거진 연재를 마칩니다. '히말라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던 글이었기를 소망해봅니다. 책 저자소개에도 썼지만 개고생의 여행 경험을 웃기는 글로 잘 풀어낼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다음에는 국토종단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https://brunch.co.kr/publish/book/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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