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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Apr 14. 2019

해발고도 4,000m의 산책

상점에서 엽서를 샀다. 아직 가지 못한 쏘롱 라의 하얀 모습이 담겨 있는 엽서였다. 산장 식당에서 밀크티를 마시며 엽서를 쓰고 밀린 일기를 썼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볼펜에 짓눌린 중지 손가락을 주무르며, 탱탱 부은 입술로 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동네만 어슬렁거릴 거야. 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하고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설산을 구경할 거야. 그게 내 계획이야. 


“입술이 더 부은 것도 같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더스틴이 말했다. 

“그래?” 

“음…. 그런데 자꾸 봤더니 이제 익숙해. 꽤 잘 어울려. 너의 커다란 입술.” 

“이게….” 

“네 말대로 오늘은 쉬고, 내일 어디 갈지나 한번 보자. 마낭에 있는 동안 근처 여기저기 올라갔다 오는 게 좋대. 고산병 예방 차원에서. 클라임 하이, 슬립 로우.” 


숙소에서 얻은 마낭 사이드 트랙(주변 등산로) 지도를 펼치며 더스틴이 말했다. 사이드 트랙의 종류는 꽤 다양했다. 나왈에서 만난 프랑스 여자가 가봤는데 그렇게 좋았다는 틸리초 호수. 이삼일이 걸리는 여정이다. 헨드릭과 로레나는 6 시간 걸리는 아이스케이브에 다녀왔는데 정말 아름다웠다고 했다.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곰파(사원)도 있다. 



“그런데 이 많은 데를 언제 다 가지. 난 틸리초는 꼭 가고 싶은데 사흘 걸린다잖아. 그럼 딴 데는 못가.” 

내가 말했다. 

“다 가는 게 말이 되냐? 가고 싶은데 한두 군데만 가야지.” 

더스틴이 말했다. 

“만약 내일 틸리초에 다녀오면, 그 후에는 힘들어서 딴 데 가기 싫어질 것 같지 않아?” 

“뭐 그럴 수도.” 

“그럼 틸리초 전에 짧은 데 하나 다녀오자.” 

“내일?” 

“…. 아니 내일은 틸리초에 갈지 말지 결정해야 하니까…. 오늘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오늘 가자고? 아무것도 안 할 거라며.” 

“안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좋은 데가 많다는데 안 가면 억울할 것 같아.” 

“음…. 벌써 12시인데….” 

“그래도 뭐…. 아이스케이브 가기에는 좀 늦었고. 곰파 갈래? 아니면…. 여긴 뭐야? 밀라레파 동굴?” 

지도 위의 점 하나를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브라가에서 왕복 3시간이라고 쓰여 있다. 


“브라가에서 마낭으로 올 때 다른 길로 빠지는 산길 하나 있었잖아. 그 길인 것 같아. 왕복 3시간이면 지금 출발해도 괜찮겠네.” 

“…. 가자!” 


남은 밀크티를 원샷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팔자야. 좀 쉬려고 했는데. 안나푸르나의 눈부심을 알아버린 이상, 조금 더 많이 보고 싶은 욕심을 잠재우기란 쉽지 않다. 걷자. 걸어야 만나지. 나의 아름다운 안나푸르나. 





와, 날이 오지게도 좋네.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내가 말했다. 오늘은 짐도 없고, 오전 내내 뒹굴뒹굴한 바람에 컨디션도 더없이 완벽하다. 설산이 병풍처럼 서 있는, 햇살 가득한 길을 걸었다. 브라가에서 묵었던 익숙한 산장을 지나쳤다. 카페에는 오늘도 황금색 빵이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다. 산장 뒤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외계행성 같은 널찍한 평야가 등장했다. 꼬마 아이 두 명이 서로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설산 아래 들판을 걸었다. 긴 털을 복슬복슬 두른 거대 한 야크 다섯 마리가 체스 게임을 하듯 알록달록 장식하고 있는 들판을. 


“여길 어떻게 걸어. 여기로 가는 거 맞아?” 

더스틴을 뒤쫓아 가며 내가 물었다. 한 시간 반을 걸어 좁은 산길로 들어선 참이다. 점점 좁아지던 길은 한 줄로 조심히 서서 가야 하는 벼랑길이 되어버렸다. 


“몰라…. 그런데 여기 말고는 길이 없잖아?” 

그렇긴 해. 우리는 마낭에 두고 온 배낭만큼 무거운 의구심을 끌어안고 조금씩 조금씩 벼랑 가까이 다가갔다. 발 하나만큼의 폭. 그 옆에는 3층 높이의 낭떠러지. 우리 두 사람을 지탱해 줄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러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모래성 같은 흙길.



“으아아….” 

더스틴이 가는 비명을 내뱉으며 벼랑 위를 걸어갔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닉 왈렌다의 아슬아슬한 걸음을 보고 있는 아찔한 기분이다. 아니, 닉 왈렌다의 걸음은 구경하면 그만이지만 저 길은 내가 가야 할 길…. 


“으어어….” 

한 발을 내디뎠다. 배에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기분. 두 발. 건너편에 선 더스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왜 그래? 아니 건너올 때는 괜찮았는데 네가 건너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어떻게 거길 건넜나 싶어서.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우씨…. 오른발 아래로 흙이 후드득 떨어졌다. 


길 아닌 것 같은 길은 계속됐다. 위험을 무릅쓰고 벼랑길을 건너온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벼랑길이었다. 지금이라도 마낭으로 돌아갈까? 이런 길을 몇 번이나 더 건너야 하는 건지 모르잖아. 내가 말했다. 그렇지. 그런데 마낭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방금 건너온 그 길은 다시 건너가야 해. …. 이왕 건넜으니 끝까지 가보자. 이번엔 내가 앞장섰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흙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악! 발을 헛디뎌 오른 다리가 무릎까지 벼랑 아래로 빠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길을 짚어 겨우 다리를 올려 세웠다. 우리 뭐 하는 거니. 원래 쉬기로 한 날이었잖아. 왜 느닷없이 목숨을 걸고 벼랑길 위를 걷고 있는 건데. 지나온 길을 되돌아봤다. 건너오면서 흙을 잔뜩 떨궈버린 바람에 안 그래도 좁은 길은 더 좁아져 버렸다. 마낭에 돌아갈 때는 어떡하지. 모르겠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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