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지 Apr 07. 2019

좀비와 오리의 트레킹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공기가 차다. 낯선 방을 둘러본다. 하얗게 페인트칠이 된 천장. 침대 옆에는 주황색 배낭이 비스듬히 누워있고, 회색 운동화 두 켤레가 나뒹굴고 있다. 내 옆에 누워있는 더스틴.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 반을 덮어버린 더스틴이 차갑게 식은 침낭 안에서 쌕쌕 대며 자고 있다. 그래. 나는 이 남편이라는 놈과 2주째 산을 오르고 있지. 그리고 지금은 안나푸르나 중턱인 브라가의 산장에 누워있고. 


그런데 뭐가 이상한 거지. 평범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2주째 산을 오르고 있는 게 평범한 상황은 아니니까. 하얀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워 상황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 어제 뭘 했지? 말다툼. 시답잖은 싸움이 또 크게 번졌지. 싸우고 갈라졌다가 헨드릭과 로레나를 만나고…. 커피를 마시다 독일 고등학생을 만났잖아. …. 기분이 왜 찝찝한 걸까. 얼굴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난다. 밤새 얼굴이 변해버린 걸까. 얼굴? 이물감이 느껴지는 곳을 따라 손을 짚어봤다. 입술…! 밤사이 오리로 변한 것인가? 입술에 볼때기 한 근이 붙은 것처럼 잔뜩 부어있다. 


“더스틴. 더스틴…! 야 일어나 봐!” 

“…. 왜.” 

“내 입술 봐.” 

“…. 뭐야. 괴물이다.” 

“고산병 증세에 입술이 붓는 게 있어?” 

“글쎄….” 

“어제 건조해서 스파이시한 립밤을 잔뜩 발랐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가?” 

“…. 또 무슨 소리래. 설마 립밤 때문에 그러겠어? 건조할 때 바르라고 있는 립밤인데. 하여간 이론 세우기를 좋아한다니까.” 

“닥쳐.” 

“걷다가 입술 떨어지겠다.” 


정말 떨어지겠다. 무게가 두 근은 되는 것 같다. 잠에서 깼더니 거대한 벌레가 되어버린,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야 네 손은 왜 그래?” 

“어?” 

더스틴의 손바닥. 껍질이 허옇게 일어나 있다. 너 이제 좀비 되는 거야? 난 오리가 되고? 





짐을 챙겨 마낭으로 향했다. 오리 같은 입술과 좀비 같은 손바닥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오리가 되었건 벌레가 되었건 산은 올라야 하니까. 마낭에 가면 뭐할 거야? 외계 행성처럼 묘한 풍경 속을 걸으며, 내가 물었다. 영화관 갈 거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영화관이 마낭에 있대. 더스틴이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영화라니 참 너답다. 난 PC방 갈래. 마낭에는 인터넷 되는 데가 있겠지? 산에 온 뒤로 엄마한테 연락을 못 해서 불안해. 


마낭이다. 널찍한 마을 길 양옆으로 숙소와 식당이 가득하다. 개 한 마리가 지나갔다. 여기 개들은 추운 날씨에 걸맞게 털이 많고 길다. 우리는 오래 묵을 만한 깔끔하고 괜찮은 숙소를 찾아 마낭을 샅샅이 뒤졌다. 마낭은 트레커들이 쏘롱 라에 오르기 전 고도 적응을 위해 며칠간 묵는 마을이다. 우리도 그럴 예정이다. 눈부신 설산을 마주하며 커피도 마시고, 2주간 단단히 뭉친 근육도 풀고, 근방으로 짧은 트레킹을 다니며 고도 적응도 하고. 그러니까, 안나푸르나에서의 짧은 휴가다! 


마을 중간 즈음에 있는 숙소를 잡았다. 2층 방으로 갔다. 창에 달린 커튼을 젖혔다. 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웅장한 설산이 창문을 한가득 메우고 있다. 볕 잘 들고 전망이 끝내주며 깔끔하기까지 한 이 방이 하룻밤에 고작 100루피(약 1천5백 원)다. 가이드북은 고작 400루피(약 6천 원)하는 음식 값이 비싸 다고 투덜댈 게 아니라, 놀라서 턱이 빠질 정도로 저렴한 숙박비를 찬양해야 할 지어다. 



“어?” 

“어이, 왔어?” 

숙소 식당으로 내려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트레킹의 시작을 함께했던 엘리. 브라탕에서 만난 아멧. 히말라야에서 가장 뜨거운 커플 헨드릭과 로레나. 브렛은 다시 못 만났어? 내가 엘리에게 물었다. 응. 워낙 빨리 걷는 친구라. 이스라엘 축제는 안 놓치고 잘 갔고? 어. 헤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모여서 종일 파티했어. 아멧이 말했다. 담요 하나를 나눠 두르고 있는 헨드릭과 로레나의 사랑은 산을 오르며 더욱 깊어진 것만 같다. 


뭔가 애틋해. 


베시사하르에서 마낭까지 오르는 데 열흘.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 한두 번 스쳐 간 인연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사람들. 지나온 날들과 앞으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사이. 이렇게 해발 고도 4,000m 마낭에서 다시 만났다. 삶의 중요한 순간을 나눈 나의 동지들. 



이전 15화 난 지금, 히말라야를 걷고 있는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