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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Mar 31. 2019

난 지금, 히말라야를 걷고 있는걸

“어이.” 

누군가 우리를 향해 외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올백으로 넘겨 묶은 긴 머리. 짙은 눈썹과 날 선 코. 말투가 어딘가 엘리를 닮은, 브라탕 찻집에서 잠깐 만난 적 있는 이스라엘 트레커 아멧이다. 아멧이 숨을 헉헉대며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하나로 동여맨 아멧의 머리가 촐랑대며 그를 뒤쫓았다. 얼굴에 묻은 눈물을 맨손으로 얼른 닦아내고 태연하게 아멧을 맞았다.  


“아! 좀 쉬다 가야겠네.” 

아멧이 커다란 배낭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뛰어왔어?” 

더스틴이 물었다. 

“뛴 건 아니고…. 내일 마낭에서 이스라엘 명절 축제가 있다잖아. …. 그거 때문에 며칠 째 쉬지도 못하고 계속 걷기만 했어.” 


며칠 전 브라탕 찻집. 홍차를 홀짝이며 아멧은 말했었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은 이번이 두 번째야. 처음 왔을 땐 단체 여행으로 왔어. 그땐 사람들이 며칠 만에 산을 오르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걸어서, 너무 빨리 걸었어. 그래서 풍경은 제대로 감상 못 했지. 그래서 다시 온 거야. 철저히 ‘휴가’ 차원에서. 이번엔 즐기고 쉬기 위한 트레킹이기 때문에 최대한 느리게 한 마을에 며칠이라도 머물며 즐길 거야. 



그랬던 아멧인데. 지금 우리 앞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다. 뛰지 않았다지만 뛴 게 분명하다. 차라리 혼자 걸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는데. 아멧을 보니, 혼자 걷는다고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닌가 보다. 최대한 느리게 걸으려고 작정하고 온 그인데도, 저렇게 어딘가에 끌려 뛰어다니다니. 




“음음 이 냄새….” 

더스틴이 코를 벌름거렸다. 찬바람 사이로 오랫동안 잊고 지낸 커피 향이 묻어났다. 브라가 마을이다. 브라가는 커피로 유명한 마을이라고 들었다. 지나가는 산장마다 황갈색 빵들이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다. 빵에다 커피. 갓 구운 빵에 따뜻한 커피…. 


“브라가에서 묵자.” 

내가 말했다. 마낭이 고작 한 시간 거리지만, 그건 내일 걷는 걸로 하고 커피를 마시자. 


창가에 앉아 시나몬 롤과 커피를 시켰다. 커피가 나왔다. 까맣고 따뜻한, 안나푸르나에 올라 처음으로 마시는 제대로 된 커피. 값은 똥값이다. 히말라야 설산이 한눈에 보이는 이 테라스에서 즐기는 커피 한 잔이 고작 50루피(약 700원)다. 



“어디서 왔어?” 

반대편 테이블에 홀로 앉은, 긴 밤색 머리에 회색 후드티를 입은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의 이름은 안나. 2주 정도 걸었더니 안나푸르나 대화법을 알 것 같다. 무턱대고 합석한다. 말을 건다. 그렇게 낯선 이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독일. 넌?” 

“한국. 얜 한국에 사는 미국인. 혼자 왔어?” 

“아니. 친구들이랑 걷고 있어. 고등학교 친구들 20명.” 

“아…. 졸업여행인가 봐?” 

“아니. 아직 졸업은 안 했어.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야.” 

“어? 그게 가능해?” 

“무리 좀 했지. 봄 방학이 2주인데 학교에 말해서 1주를 더 허락받은 거야. 2주 동안 트레킹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잖아. 여행 올 돈 모으려고 방학 전에 일도 엄청 많이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고3인데 이렇게 오래 여행해도 되냐는 질문이었어. 한국에서는 어렵거든. 난 별로 성실한 학생도 아니었는데 고3 때는 새벽에 학교 가서 자정 넘게까지 책상에 붙어있었어.” 

내가 말했다. 


“왜?” 

“대학에 가려고.” 

“그렇게 안 하면 대학에 못 가?” 

“음…. 꼭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데 안 그러면 불안해. 다른 애들은 열심히 공부하는데 나만 안 하고 있으면 뒤처질 것 같고.”  

“흠…. 꼭 그래야 해? 의지가 있으면 이런 여행이 불가능한 건 아닐 거 아냐.” 

“뭐, 그렇지. 불가능하다고는 말 못 하지. 그런데, 어렸잖아. 어른들은 책상을 잠시만 떠나면 큰일 날 것처럼 얘기하고. 주위 다른 애들이 다 그렇게 살고. 그러니까 다른 게 가능하다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억울하다. 시험 점수를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책상에 붙어있어야 했던 내가 지나온 그 시절이. 부럽다. 고3이지만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어도 되는 안나의 현실이. 십 대에 히말라야를 만난다면, 이십 대의 삶은 얼마나 더 풍요로울까. 


‘넌 어떤 상황에서든 불만거리를 찾아내잖아.’ 

더스틴의 한 마디가 생각났다. 뜨거운 커피로 그 말을 삼켰다. 그래. 십 대 때 이곳을 걷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건 뭔데. 난 지금, 이 멋진 히말라야를 걷고 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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