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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Mar 24. 2019

히말라야의 중심에서 피 터지게 싸우다

흠. 

흠…. 

젠장. 


열 걸음 남짓 걷다 멈췄다. 안 돌아오면 어쩌지. 정말 혼자 가버리려는 건가? 저 인간이 빈말은 안 하는데…. 자존심 상하지만 이제라도 따라가 봐야 하나. 마낭을 넘으면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의 최대 고비인 쏘롱 라다. 그 길을 혼자 걸을 수 있을까…. 일단 만나자. 만나서 끝장을 보든 마낭까지 함께 가든 하는 거야.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간 줄 알고 찾나? 더스틴이 간 방향을 살펴봤다. 텅 빈 벌판뿐, 더스틴은 없다. 


반대 방향으로 간 걸까. 뒤로 돌아 나왈 방향으로 걸었다. 더스틴과 함께 걸었던 길을 홀로 걷는다. 트레커들이 하나둘 나를 스쳐 갔다. 모두가 마낭 방향으로 걷고 있다. 나무가 듬성듬성 난 초원 위로 설산이 우뚝 솟아있다. 와-. 감탄에 입을 헤 벌린 트레커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길을 거슬러 갔다. 저기요, 동그란 얼굴에 수염 잔뜩 난 남자 못 봤어요? 갈색 비니 쓰고 있는데…. 저기요, 혹시 더스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못 봤나요? 파란 배낭을 메고 있는데.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보면 반대 방향으로는 안 갔나 보다.



우씨. 


짜증이 났다. 내가 왜 더스틴을 만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어야 해? 그러다 걱정이 됐다. 오늘 안에 못 만나면 어떡하지? 내일도, 모레도 못 만나면? 산에서 내려갈 때까지 못 만나면? ….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저 벌판 건너편으로 가서 굴러 떨어져 버렸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 마구 겹쳐 머리가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어지럽다. 전화도 없는데. 인터넷도 없고. 체코 트레커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을 첫 숙소에서 만나자는 대책을 세워놓은 것도 아니고. 한 무리의 트레커들이 다시금 나를 스쳐 갔다. 오늘따라 날씨 한 번 청명하다. 눈 시린 설산 아래 트레커들의 얼굴은 더없이 해맑다. 나도 딱 저런 표정이었는데. 오늘 아침까지는 말이지. 


다시 방향을 틀어 마낭을 향해 걸었다. 다음 마을인 브라가까지만 가보자. 가는 길에도 못 찾으면 브라가 첫 번째 숙소에서 묵는 거다. 찾을 수 있겠지. …. 찾을 수 있을까? 걱정과 짜증과 화와 울분의 온갖 감정에 속이 울렁거리는 가운데 앞에 펼쳐진 설산은 기차게도 하얗고 커다랗다. 오늘은 파란 하늘, 하얀 설산, 그리고 초록색 널따란 평지까지 아주 죽이 딱 맞는다. 징하게도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부글거리는 마음 때문에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억울하다. 풍경이 아름다울수록 더 화가 난다. 이 아까운 풍경을 조금의 화를 못 참아서 이렇게 망쳐버리다니. 


“어이.” 

나에게 손을 흔드는 남자. 더스틴이다. 브라가 마을 초입 작은 계단, 헨드릭과 로레나 커플과 함께 앉아 구미베어를 나눠 먹고 있다. 아 왜 하필 쟤네야…. 


“그래서 오늘 새벽에 그 구간으로 다시 돌아갔어. 이 산에 와서 제일 잘한 일인 것 같아.” 

더스틴이 말했다. 뭐야? 나는 걱정이 돼서 혼이 났었는데 풍경 얘기나 지껄이고 있었어? 구미베어 따위나 질겅이면서? 나는 아무 말 없이 더스틴 손에 들린 젤리 봉지를 노려봤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여기 있으면 놓칠 일은 없잖아. 더스틴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길 잃었다며? 다행이다 둘이 이렇게 다시 만나서.” 

로레나가 말했다. 대충 둘러댄 모양이군. 그래. 세상 다정한 헨드릭과 로레나에게, 너무 다정한 나머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 커플에게, 우리는 피 터지게 싸운 다음 헤어져 따로 걸었다고 하면 쪽팔릴 테니. 우리 넷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계단가에 서서 쓸데없는 얘기를 나눴다. 어느 숙소에서 묵었는지.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나왈 뷰 포인트는 가 봤는지. 쓸데없지만 안나푸르나에서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 



헨드릭과 로레나는 마낭까지 간다고 했다. 우리는 길가 찻집으로 갔다. 마낭 가면 밥값이 많이 비싸진다는 찻집 주인의 말에 비스킷을 한 봉지 샀다. 


“아까 한 말, 진심이야? 정말 오늘이 최악의 날이야? 나 때문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비스킷 봉지를 구기며 내가 말했다. 봉지는 잘 뜯어지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아까만큼은 정말 그랬어. 오늘은 안나푸르나에서 최악의 날이었고, 그건 너 때문이었어.” 

“….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눈물이 핑 돈다. 어떤 말을 들어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나랑 여기 걷는 게 그렇게 싫어?” 

내가 되물었다. 

“스위티, 당연히 아니지.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어. 지금 우리가 하는 안나푸르나 여행은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야. 당연히 너랑 같이 하고 싶지.” 

“그런데 왜 자꾸 나를 못 참겠다는 듯이 굴어? 화를 내고, 혼자 가버리거나…. 다른 애들이랑 쌩하니 가버릴 땐 내가 얼마나 서운한지 알아?” 

쪽팔리게 눈물이 난다. 


“…. 그래. 그건 미안해. 화를 내는 것도 미안하고 혼자 가버리는 것도. …. 그런데 한 번 생각을 해봐. 매일 같이 걷는데 너는 그렇게 한결같이 느려. 날이 이렇게 좋고 풍경도 좋은데, 너는 감기에 걸려있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배낭이 무겁대. 그리고 그 얘기를 매일 매시간 해. 그럼 내가 어떨 것 같아? 난 가끔, 네 가 뒤에서 나를 붙잡고 있는 기분이 들어.” 

“넌 어떻게…. 그러니까 네가 화를 내고, 혼자 가버리고, 다른 애들이랑 가버리는 게 다 나 때문이라는 거야?” 

“네가 조금 속도를 내고 나랑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함께 걸을 수 있잖아. 다른 애들이랑 같이 걸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왜 그걸 네 속도에 맞춰서 해야 하냐고. 내 속도에 맞추면 되잖아? 생각을 해봐. 내가 네 속도를 따라가는 건 어렵지만, 네가 조금 천천히 걸 어주는 건 그것보다 쉬워. 왜 꼭 네 속도에 맞춰 걸어야 하고, 네가 즐기고 싶은 방식대로 즐겨야 해? 나한테 좀 맞춰주면 안 돼? 네가 그렇게 이해심이 없는 사람이었어?” 


내가 기대했던 건 이런 게 아냐. 난 이 산에서 우리 관계가 더 좋아질 줄 알 았어. 커다란 산을 함께 넘으면서, 힘들 때 도와주고, 서로를 위하고…. 뭐 그 런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나란히 걸을 때도 별로 없고. 넌 그냥 나를 귀찮게만 여기고. 내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몸이 힘들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내가 좀 미성숙해서, 그런 상황에 더 예민하고 날카롭게 굴지만, 이런 걸음들이 우리를 더 단단해지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 아까 한 말은 사과할게. 더스틴이 손을 내밀었다. 손만은 진짜 따뜻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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