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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Mar 17. 2019

히말라야 최악의 날


새벽 6시. 해에 달아오른 히말라야의 얼굴이 창밖에 슬쩍 비쳤다. 문을 열었다. 핑크빛으로 물든 커다란 설산. 아-. 차가운 공기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이렇게 아름다울 거면 기척이라도 하지 그랬어.



전에 없이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서 가루-나왈 구간으로 되돌아 걸었다. 공기는 안개에 촉촉이 젖어있었다. 안개에 살짝 젖은 흙을 짓이기는 우리의 발소리뿐, 사방이 고요하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바람도 일지 않는다. 30분을 걸어 어제 한참을 앉아있었던 뷰포인트에 도착했다. 아…. 와….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어제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설산을 가리고 섰던 구름은 밤사이 깔끔이 걷히고 없다. 아직 차가운 밤빛 하늘 아래 오로지 설산만 남아있다. 굉장해. 아름다워. 이런 건 전에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어. 우리는 누가 더 말을 못 하나 경쟁이라도 하듯,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설명하기에는 2%도 안 찰 말들을 지껄였다. 안나푸르나 2봉과 3봉, 4봉에 강가푸르나, 틸리초,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설산들의 파노라마가 바로 앞에 펼쳐져 있다. 있지, 한국에 돌아가서 사람들한테, 내가 이런 경치를 봤다고 하면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대체 뭐라고 설명할 건데. 몰라. 사진을 찍었다. 부족하다. 파노라마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부족하다. 시를 써볼까. 고작, ‘세상에서 본 풍경 중 가장 아름다운 히말라야’ 정도의 후지고 뻔한 표현이나 나오겠지만. 





나왈을 나선 건 11시 즈음이었다. 큰 마을인 마낭까지 앞으로 네 시간. 부지런히 걸으면 오늘 별 무리 없이 마낭에 도착할 것이다. 널따란 초록 들판 위에 하얀 설산 하나가 우뚝 서 있다. 파란 하늘에는 아기의 턱받이처럼 작은 구름이 걸려있다.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들여다봤다. 실제보다야 훨씬 못하지만, 초록과 하양과 파랑의 색감만은 잘 담겼다. 


조금 더 걸었다. 설산은 조금 더 커 보이고 들판의 색깔도 더 선명해 보인다. 다시 사진을 찍었다. 걸었다. 더스틴이 두 손으로 배낭끈을 잡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청명한 하늘 아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금 짜증 난 표정이다. 내가 가까워지자 다시 뒤로 돌아 저벅저벅 걸어가 버린다. 아 좀 같이 갈 것이지. 햇살이 강해서 그런지 오늘의 세상은 색감이 너무 예쁘다. 두 걸음에 한 번씩 사진을 찍게 만드는 풍경이다. 


“자꾸 그렇게 멈추면 어떡해.” 

다시금 나를 기다리고 있던 더스틴. 이번엔 가버리지 않고 나를 맞이했다. 

“사진 찍으려고 그래.” 

“그러면 말을 하고 찍어. 뒤돌아보면 자꾸 없잖아.” 

“잘 찍으려고 그래.” 

“그럼 난 갈 테니까, 나중에 왜 혼자 가버렸냐고 뭐라고 하지 마.” 

“아 좀 기다렸다 같이 가면 되잖아?” 

“그럼 기다리라고 말을 하고 사진을 찍으라니까?” 

“말을 어떻게 해? 네가 이미 저 멀리 가버렸는데 어떻게 말을 하냐고. 막 네 이름 부르면서 소리 질러?” 

“그럼 사진을 좀 적당히 찍든가, 아니면 사진 찍을 때 말고는 좀 빨리 걷든가!” 

“아 좀! 그 빨리 걸으라는 말 좀 그만할 수 없어? 천천히 걷는 게 뭐가 그렇게 나쁜데? 경치가 이렇게 좋은데 잠깐 멈춰서 사진도 좀 찍을 수 있는 거 아냐? 그리고 짜증 내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그렇게까지 화를 낼 건 뭔데? 너랑 걷는 거 좀 싫어지는 거 알아? 걷는 내내 느리다고 잔소리나 하고. 너랑 있으니까 산을 즐길 수가 없어!” 


오늘 걷는 길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래서 사진에 담아본다. 그래서 싸움이 난다. 아니, 더스틴에 따르면, 내가 말도 없이 뒤처져서 싸움이 터진 거란다. 내 의견에 따르면, 좀 기다려주면 될 것이지 사소한 거 하나하나에 화를 내는 더스틴이 싸움의 원인이다. 오늘의 웅장한 설산을 앞에 두고 나와 더스틴이 느끼는 건 감사도, 감격도, 벅차오름도 아니다. 짜증이다. 서로에 대한 짜증. 철없는 두 개인이 함께 사는 건 힘든 일이다. 그 두 인간이 같이 산을 오르는 건 더 힘든 일이다. 그 두 인간이 산을 몇 날 며칠 오르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함께하는 건 이따금 낭만적이지만, 이따금 지치는 일이다. 



“참나…. 야 네가 언제는 뭘 즐기는 애냐? 머리 아프다, 다리 아프다, 배낭이 무겁다…. 날씨가 얼마나 좋든, 설산이 얼마나 아름답든, 어떻게든 불만거리를 찾아서 거기에 집중하는 네가?” 

더스틴이 말했다. 


“아니 무슨 말도 못 해? 머리 아프다, 발 아프다, 말도 못 하냐고. 내가 뭘 해 달라는 거야? 그냥 아프다는 거잖아? 그렇게 싫으면 어차피 나랑 속도도 안 맞겠다, 그냥 혼자 걸어. 그게 오히려 속 편하고 좋겠네.” 

“내가 왜 혼자 가? 혼자 가려면 내가 여기 너랑 왜 왔는데? …. 그거 알아? 이 앞에 풍경을 봐. 이 길을 보라고. 오늘이 안나푸르나에서 가장 좋은 날이 될 수 있었는데, 너 때문에 다 망쳤어. 너 때문에, 오늘이 안나푸르나에서 최악의 날이 되었다고. 나 아까 너한테 늦게 온다고 화낸 거 아니다. 조금 짜증 낸 거다. 그런데 알아? 나, 지금 너한테 정말 화났어. 네가 원하는 대로 어디, 혼자 잘 걸어봐!” 


아니 누가 할 소릴? 더스틴은 몸을 틀더니 엉뚱한 방향으로 마구 걸어가 버렸다. 저 바보가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건데? 더스틴이 걸어가는 길은 길도 아니었고, 걸어가는 방향 끝에는 텅 빈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맘대로 해라. 이 산 하나 같이 다정하게 못 오를 거면 앞으로는 어떻게 같이 살 건데? 때려치워. 다 때려치우자고. 나는 브라가 방향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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