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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Apr 23. 2024

일요일, 당고개행 열차

아무렇게나 쓰는 소설

노인은 좌석에 앉은 채로 몸을 앞으로 쭉 뺐다. 건너편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역 이름을 읽어보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양손으로는 앞에 놓인 바퀴 달린 자주색 장바구니와 그 위에 걸어놓은 검은 비닐봉지를 꼭 쥔 채다. 낯빛은 햇볕에 바짝 마른 낙엽처럼 건조하고 거무스름했지만 립스틱을 바른 입술만은 빨갰다. 노인은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동차 안에는 열댓 명의 사람이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노인이 목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움직이자 짧게 쳐낸 머리가 빛바랜 보라색 패딩에 스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기가 무슨 역이요?”

노인이 한 칸을 비우고 그 옆에 앉은 30대 여자에게 물었다.


“네?

”방금 지난 역이 무슨 역이요? “

“아... 방금 혜화역 지났어요.”

여자는 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양 엄지로 무언가를 바쁘게 쳤다. 여자의 긴 밤색 생머리가 찰랑거렸다. 노인이 여자의 하얀색 패딩을 톡, 쳤다.


“이다음이 한성대입구역이지요?”

“네? 아 네....”

“그다음은 길음이고?”

“아....”

짝짝이로 그려진 노인의 회색 눈썹이 위로 쓱, 올라갔다.


“아뇨.... 성신여대입구 지난 다음에 길음이에요.”

“아.... 아이고, 참! 성신여자 거기를 깜박했구먼? 내가 동대문서 쌍문까지 자주 지나 댕겨서 이 길을 잘 아는디.... 히히.”


성신여대, 길음, 미아사거리, 미아... 노인이 빳빳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역 이름들을 중얼거렸다. 노인이 그러 고 있는 사이 여자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칸으로 가버렸다. 한성대입구역을 지나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멈춘 열차의 문이 열리고, 대여섯 명의 승객이 올라탔다. 파란색 등산 잠바를 입은 60대 중반의 남자가 노인 옆에 앉았다.


“등산하고 오요?”

노인이 처지고 작은 눈을 들어 올려 남자를 보고 물었다.


“아 네. 북한산 갔다가, 우이선 타고 내려오는 길이요.”

남자가 검은색 비니를 벗어, 앞 바닥에 내려둔 배낭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비니에 반쯤 가려졌던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염색을 했는지 새까만 노인의 머리색과 대비되어, 둘은 마치 바둑판에 나란히 놓은 흰 돌과 검은 돌 같았다.


“이렇게 추운디?”

“아 이렇게 추워야 등산할 맛이 나죠. 조금만 날 풀리면 더워서 더 힘들어.”

“그런가? 히히. 좋겠네. 젊어가지고 이렇게 팔팔하게 놀러도 댕기고.”

“아휴. 제가 내일모레면 일흔이요 일흔. 젊긴 뭐가 젊다고.”

“에끼. 일흔이면 청춘이지! 난 내일모레면 여든이여. 우리 영감은 아파서 집 밖으로 나가도 못 혀는디. 일흔도 안되야서 이렇게 일요일이면 산에도 댕기고 얼마나 좋아?”


남자가 허허, 하고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노인보다 젊은 게 미안하다는 듯이.


“우리 영감은 풍이 와가지고 밤낮 누워있어. 집에서 화장실 정도야 가지만 밖에 나다니지는 못해. 만날 그렇게 꼼짝없이 누워있음서 뭘 한다고 감기까정 걸려가지고... 하도 골골거렸싸서 저기 경동시장 가서 엄나무랑 사 오는 길인 겨. 그게 감기에도 좋고, 또 풍에도 좋고 그렇다고 전번에 테레비에서 그러대? 거 갔다가 쩌기 종로 5가 가서 내 관절염약도 타오고. 거기가 약을 싸게 판다고 그래서 난 늘 거기까지 사러 댕겨.”

“그라요? 고생하시네.”

“오늘은 그래도 일요일잉께 이렇게 나왔쟤. 일요일 아닌 날은 도매시장서 야채 띠어다가 역 앞에서 팔어. 근데 일요일은 동네 마트가 문을 닫어버려서 사람들도 안 나와버링께. 그래서 일요일은 나도 쉬어쁘러.”

“그래요. 가끔 쉬셔야 몸에 탈 안 나고 그러지요. 어르신까지 아파불면 큰일 아니요?”

“큰일은 뭔 큰일이여? 이자 다 살았는데. 이렇게 살다 아파불면 저세상 가버리면 그만이지. 나는 그냥 이 무릎만 좀 덜 아팠음 좋겄소. 무릎이 성치 않응께 어찌나 성가신지... 이제 무슨 역이요?”

“이제 길음 지났어요. 어디서 내리시는데?”

“응. 쌍문.”

“저는 다음에 내려요.’”

“응 그랴요 젊은 양반. 살펴 가소.”


미아사거리역에 정차한 열차에 한 줌의 사람들이 올라탔다.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 손에서 제 손을 스르르 빼더니 한적한 열차 안을 마구 뛰어다녔다. 노란 털모자를 쓴 아이의 양쪽 볼은 사과처럼 빨갛고 통통했다. 아이는 속도를 늦추고 무언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더니, 노인을 발견하고는 아장아장 그 앞으로 다가갔다.


“오메. 이쁜 아기네, 응? 너 아주 이삐다, 잉?”

노인이 아이를 보며 활짝 웃었다. 아이가 노인 쪽으로 제 짧은 다리를 한 번 더 내디뎠다. 노인은 얼굴을 아이 쪽으로 쭉 내밀고는 “까꿍! 까꿍!”하고 아이에게 소리쳤다. 아이가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대고 고개를 갸웃, 하더니, 이내 까르르 웃으며 노인에게 안길 듯 양팔을 들어 올렸다. 대각선 좌석 중간에 앉아있던 아이 엄마가 아이 뒤로 다가왔다.


“하이고, 뭔 애기가 이러코롬 예쁘요? 애교도 백 점이네 백 점이야, 응?”

“하하, 감사해요.”


아이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제 짧은 손가락으로 노인의 검은 바지를 쿡 찌르더니 꺄, 하고 웃었다. 노인이 무릎을 부여잡고 뒤로 나자빠지는 척을 하자 아이가 꺄하하! 하고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메고 있던 작은 크로스백에 손을 넣었다. 뽀로로가 그려진 가방을 한참 뒤적이던 아이가 노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스틱에 꽂힌 토끼 모양의 초콜릿이었다.


“잉? 나 주는겨? 근디 이 할무이는 이가 다 빠져부러서 이런 거 못 먹는디. 우리 이쁜 아기 먹어, 잉? 오메, 고마워서 눈물이 나 뿔라 그러네, 잉?”

노인의 눈가에 잔잔한 주름이 가득 퍼졌다. 아이가 헤, 하고 웃으며 내밀었던 초콜릿을 다시 소중히 제 가방에 집어넣었다. 노인이 아이 엄마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우리 손주 요만할 때는 자주 봤는디.... 아들 하나 있는 게 지 자식 다 컸다고 이제 안 와부러. 무슨 복잡한 일 현다고 어디 지방 내려가더니.. 하기사. 서로 안 보는 게 속 편하쟤.”

“네...”


아이 엄마는 어색한 미소를 띤 채로 잠시 서 있다가, 아이 손을 잡고 조금 전 앉아있던 좌석으로 돌아갔다. 노인 건너편에 앉아있던 40대 여자가 뒤를 돌아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노인에게로 다가왔다.


 “어르신, 여기 쌍문역인데. 아까 쌍문역에서 내린다고 하신 거 같아가지고....”

“으잉? 워매 내 정신 좀 봐라. 아이 어쩐댜.”


노인이 고개를 빼 역 이름을 확인하는 사이 열차 문이 닫혔다. 노인이 혀를 쯧쯧 찼다.


“다음 역에서 내리셔서 돌아가셔야겠네요. 짐도 많으신데....”

여자가 노인 옆으로 앉으며 말했다.


“괜찮혀. 요샌 엘리베이터 다 되어있으니께 그거 타면 되어. 집에 불 올려놓고 온 것도 아니고, 늙어빠진 영감 하나 기다리고 있는데 좀 늦어져도 암 상관도 없어. 아가씨는 어디, 데이트 댕겨오는겨?”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물었다.


“아, 아뇨. 일이 있어서 회사에 갔다가요.”

“워메. 젊은 사람이 일요일에 쉬지도 못허고 고생혀네.”


노인이 장바구니 위에 올려둔 검은 봉지를 뒤적거렸다. 부스럭부스럭, 부스럭부스럭... 타닥타닥, 타닥타닥... 비닐봉지가 비벼지는 소리와 전철이 전진하는 소리가 오묘하게 맞부딪히며 열차 안을 가득 채웠다. 비닐봉지에서 나온 노인의 손에는 여기저기에 상처가 난 작은 사과 한 알이 들려 있었다.


“아.... 저 먹으라고요? 괜찮아요, 어르신.”

여자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이 내가 고마워서 그려. 아가씨 아니었으면 쩌기 당고개까지 가버렸을지 누가 알어.”

“아녜요 정말 아니에요. 저 회사에서 밥 먹고 왔어요.”

“아이 받으쇼, 내가 고마워서 그려.”


노인과 여자가 실랑이하는 사이, 열차는 지상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어두운 터널 안을 달리던 열차가 바깥으로 고개를 쑥 내밀자, 차창 밖으로 만지면 아주 차고 딱딱할 것 같은 네모난 빌딩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했다. 이번 역은 창동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열차 안에 울려 퍼졌다. 노인이 지지대를 잡고 끙, 하고 일어서더니, 여자의 손에 사과를 쥐여주었다. 노인은 저항하려는 여자의 어깨를 툭, 툭, 토닥이더니 바퀴 달린 장바구니에 몸을 기대고 느릿느릿, 문 앞으로 걸어갔다. 노인이 앞으로 나아가는 박자에 맞춰 장바구니 위에 달린 검은 비닐봉지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열차가 창동역에 정차했다. 문이 열리자  겨울 공기가 안으로  끼쳐 들어왔다. 밖으로 나간 노인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좌우를 살피고는 천천히,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열차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역에서 멀어질수록 노인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노원역을 향해 나아가는 열차의 속도가 빨라지자 차창 밖의 물체들이  각각 가지고 있던 형체를 허물어버리고 마구 섞여 들다가 흐릿해졌다.  멀리 ,  쌓인 북한산 자락만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고요하게, 우두커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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