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일기 10. 뭐냐고!
지하철을 탔다. 오랜만이었다. 회사 다닐 땐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하는 일이 영혼을 어딘가로 쏙 빼놓고 지하철을 타는 일이었는데, 백수가 되니 지하철 탈 일이 별로 없다. (백수 주제에 차를 자주 끌고 다니기도 하고.) 지하철은 기억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았다. 너무 빨리 찾아온 한여름 날씨 탓에 에어컨이 빵빵해 쾌적했다. 사람도 별로 없고 좌석은 골라서 앉아도 될 만큼 널널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내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불쾌해졌다.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끈적함. 냄새. 출근해서 퇴근 때까지 차곡차곡 쌓인 불만과 불안, 부정의 기운. 그거 곱하기 수백 명. 에어컨이 아무리 빵빵해도 소용없었다. 절정은 안국역이었다. 5시 30분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아니, 왜들 이렇게 빨리 퇴근하는 거야! 생각하다 나도 회사 다닐 때 유연근무로 일찌감치 퇴근하는 날이 있긴 했다는 게 떠올랐다. 그리고 내 잘못이었다. 사람 많은 게 싫으면 시간이 유연한 백수가 조정했어야지. 좀 더 일찍 나왔어야지. 4시 반에 집에서 나왔으니 퇴근 행렬과 동행하는 건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른 시간에는 나도 나름 (집에서) 일을 (누워서) 해야 하기 때문에 바쁘단 말이야.
사람들의 말소리와 숨소리와 기침소리, 거기에 부차적으로 딸려오는 체액과 체취 세례를 받으며 앉아있자니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출퇴근에 대한 거부. 다시 출퇴근하는 그 생활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 어떡하지? 못할 것 같은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허겁지겁 세수하고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나가서 수백 명의 사람이 이미 가득 들어찬 전동차 안에 내 몸을 구겨 넣고 갈아타고, 또 갈아타며 1시간 여를 이동하는 일.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지럽고 식은땀이 나는데. 전혀 하고 싶지 않은데.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하나. 돌아가야지. 언젠가는....
나보다 훨씬 전에 백수가 된 친구는 여기저기 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 나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일을 바로 다시 하게?"라며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봤다. "난 너 같은 팔자가 못된다고!"라고 꽥 소리를 질러줬다. 그 친구도 팔자가 엄청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보다 돈이 많고 나락으로 떨어지면 아래서 받쳐 줄 사람도 있고 아픈 부모를 부양하고 있지도 않다. 나는 아니다. 나는 벌어야 한다. 돈.... 돈.... 그놈의 돈을.
조금만 벌고 가난하게 살아볼 생각도 해봤지만 자신이 없다. 이제 실직자니까 돈을 아껴 써야지!라고 다짐했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회사 다닐 때는 공짜였던 것들이 이제는 다 돈이 들어간다. 예를 들어 탕비실에 넘쳐나던 커피나 간식 같은 거. 하루에 수십 장씩 뽑아대던 인쇄용지 같은 거. 회사에는 수십 개씩 굴러다니는 스테이플러나 커터칼, 가위 같은 사무용품들. 죄다 내 돈으로 사야 한다. 회사 다니면서 쓰던 점심값은 굳겠지 생각했지만 일주일에 세네 번 정도는 배달로나 외식으로 바깥 음식을 먹게 되는 터에 딱히 그렇지도 않다. 회사 다닐 때보다 엄마아빠 집에 자주 가는데, 빈 손으로 가지 않으니 거기에 드는 비용도 크다. 심지어 옷도 산다. 애초에 옷을 잘 안 사기도 하고 백수라 매일 똑같은 옷만 입지만 남편 옷을 사러 갔던 매장에서 여름용 나시와 반팔 셔츠를 사버렸다. 거기에 걸쳐 입을 팔 시스루 남방도 사야 해서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거기에 교통비, 관리비, 지원접수비(서류 지원에도 돈이 드는 데가 있다.), 기본적인 생활비.... 이걸 다 합치면 소비 수준은 회사 다닐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돈을 벌긴 벌어야 한다. 누구는 40대 초반에 조기 은퇴를 한다고도 하던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산이라는 게 필요하다. 한 10억 정도? 그에 비하면 내 자산은..... 실실 웃음이 난다. 그러다가 눈물이 난다. 하여간 나는 누구처럼 파이어족을 할 팔자도 못되고 내 친구처럼 오래 마음 놓고 쉴 팔자도 못된다. 거기에 더해 너무 오래 쉬면 지금보다 더욱더 안 뽑아줄 것 같은 불안감도 있고.
하.... 근데 또....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이번 주에 면접이 또 잡혔는데 서류합격자 발표 공고를 보고 겁이 덜컥 났다. 경쟁률이 너무 낮았다. 그러니까 승률이 너무 높았다. 오 이건 될 수도 있겠다!라는 기대감은 전혀 없고 걱정만 앞섰다. 진짜 되면 어떡하지? 하기 싫은데.... 못할 것 같은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기. 씻기. 옷 입기. 지옥철 타기. 갈아타기. 또 갈아타기. 출근하기. 일하기. 보고서 쓰기. 보고하기. 발표하기. 회의하기. 문서 작성하기. 잘 모르는 사람들이랑 맹탕 대화하기. 기싸움하기. 쪽팔리기. 뒷담화하기. 누가 내 뒷담화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 별로인 사람이랑 밥 먹기. 정상인인 척 하기. (직장인 여러분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면접에서 떨어지고 싶다는 건 아니다. 붙고 싶다. (아닌가...) 지원서 쓰고 면접 보는 데 에너지나 너무 많이 소모된다. 거기에 쏟는 에너지로 회사에서 일을 했다면 성과 1등을 받았을 텐데. (아닌 거 안다. 성과평과는 정말 '성과'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나도 합격하고 싶다. '제발 이 짓 좀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면접 갈 때마다 '어차피 안 되겠지'하는 마음 반, '이번엔 좀 되면 안 돼?' 하는 마음 반이다.
그러니까 뭘 어쩌고 싶다는 건가? 원하는 게 뭐야? 다시 회사에 다니고 싶다는 거야 안 다니고 싶다는 거야?
'진짜'로 원하는 걸 묻는 거라면....
"안 다니고 싶다."
회사를 안 다니면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다. 근데 이제, 거기에 살짝 안정을 섞고 싶다. 안정이라 함은 예상할 수 있는 수입이 꼬박꼬박 들어오는 거다. 그러니까.... 월급을 받고 싶다.
안다. 말이 안 되는 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현재도 글로 어떤 수익을 내고 있는 게 아니고 어찌어찌해서 수익을 조금 내는 데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월급 수준으로 만들기란, 그것도 꼬박꼬박 들어오게 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지속 가능하지 않을 확률도 높고. 5년은 시험해봐야 할 거다. 한데 5년이 지나면 마흔 중반이다. 여자 나이 마흔 중반의 경단녀를, 그것도 출산 육아로 인한 경단도 아닌 종일 누워서 글을 써보느라 경력이 단절이 된 사람을 누가 뽑아 줘.... 지금도 안 뽑아주는데....
아 슬프다.
질문을 다시 하겠다. 현실적으로 원하는 게 뭔지.
직장을 구하는 거다. (지금 바로 말고 좀 몇 달 후에...) 정해진 출퇴근 시간과 쉬는 날이 있는 직장을 구해서 안정적인 루틴을 다시 잘 구축하고, 매일 적어도 두세 시간씩은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하는 거다. 물론 쉬는 날에는 더 많이.
안다. 실제로 직장을 다니게 되면 저렇게 하기란 정말 어렵다. 회사에서 쓰는 에너지가 너무 많고 머리는 이미 터져있는데 무슨 글을 쓴다는 말인가. 여섯 시 땡 하고 나온다고 해도 퇴근길 지옥철에서 시달리다가 집에 와서 밥을 차려 먹으면 이미 8시는 족히 지나있고, 그러고 나서 쉰다고 잠깐 누워있으면 잘 시간이 되어있는데, 언제?
하지만 진짜 하고 싶다면 해야지. 천쉐 작가는 시장에서 옷장사를 하면서 매일 두 시간 동안 글을 써서 첫 소설을 완성했다고 했다. (그 후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 타이베이로 가서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아직 나에게 그럴 기회를 줄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영원히 아닐 수도..) 곽재식 작가는 글을 쓰겠다고 회사를 그만두는 일은 하지 말라고 했다. 매일 1시간을 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트위터인가 어디선가 분명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다시 찾으려고 하니 못 찾겠다. 잘못된 인용이라면 수정하겠습니다.) 안정적인 루틴을 구축하는 게 중요한데, 수입이 불안정해지면 그만큼 루틴이 흐트러진다는 취지였던 것 같다. (찾아보니 곽재식 작가님도 몇 년 전에 회사를 그만두셨다. 그리고 후회했다고는 하시는데 어쨌든 곽재식 작가님은 천재시고 화학 박사시라 회사를 그만두셨어도 교수직을 겸하고 계시고 소설책도 정말 많이 내셨다. 나는 그런 수준이 절대 안 되니까 회사를 더더욱 다녀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이제 면접을 준비하자.
아... 되면 어떡하지...
아.... 또 안되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