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다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다니다 보면 그 이유가 더 늘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커리어 쌓기, 자아실현(나도 적어놓고 어이가 없다.), 친구 사귀기, 소속감 느끼기, 사회와 경제의 성장에 기여하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며 우쭐대보기, 4천 원짜리 커피 한 잔 사주면서 대단한 인생 선배인 것처럼 굴어보기, 부모님이 (조금의 과장과 허위를 섞어야겠지만) 자랑할 수 있는 자식 되기, 뭐 하시는 분이세요?라고 누가 물으면 대답할 말이 있기, 술 마실 핑계대기, 보험을 가입하거나 대출을 받을 때, 혹은 신용카드를 신청할 때 거절 당하지 않기, 출입국 신고서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안 써도 되기 등등....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직장을 다니는 이유 1순위는 '돈벌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나의 경우는 그렇다는 거다. 고로,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실직해서 가장 아쉬워지는 건 돈이다. 나의 소비 수준은 이미 직장인 기준으로 맞춰져 버렸는데, 그 소비의 원천인 월급이 갑자기 끊겨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월급이 사라졌다고 해서 굶을 수는 없다. 당장 길가에 나앉을 수도 없다. (요즘에는 길가에 나앉는 게 돈이 더 든다.) 그런 생존과 연관된 거 외에도, 내가 포기할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ㅇ 건강하게 먹기, 그리고 그냥, '먹기'
나는 한 때 '맛잘알'이었다. 틈만 나면 맛집을 검색했다. 새로 이사 온 동네, 회사 인근, 친구를 만나기로 한 지역의 맛집, 여행을 갈 곳과 가려고 했지만 가지 않은 곳의 맛집을 틈만 나면 검색하고 표시해 둔 터에 지금도 내 지도 앱에는 맛집을 표시해 둔 별표가 은하수처럼 수두룩하다. 어떨 때는 정작 친구를 만나는 시간보다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 맛집을 연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기도 했다.
근데 어느 순간 맛집에 대한 흥미가 싹 사라졌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있고, 운동을 시작해서일 수도, 술을 거의 안 마시게 되어서일 수도 있다. 하여간 요새는 맛집 검색은커녕 식당 자체에 가는 것도 귀찮다. (식당을 운영하는 소상공인 분들 죄송합니다.) 이는 백수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더 심해졌다. 회사에 다닐 땐 집에서 음식을 하는 게 엄청난 일이었지만 이제 한 끼를 챙겨 먹기 위해 굳이 밖으로 나가는 게 더 큰일이 되어버렸으니.
대신 건강하게 챙겨 먹기에는 부쩍 관심이 늘었다. 이에 대한 이유는 명확하다. 나이가 들어서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보면, 또 그들이 지인들과 하는 대화를 보면 거의 모든 주제가 건강과 그 건강을 위해서 챙겨 먹어야 하는 음식에 대한 것이었다. 저들은 왜 저럴까, 저런 대화를 뭣하려 하는 걸까, 그것도 술을 마시면서 말이지,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러고 있다.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단백질을 하루 최소 40g은 챙겨 먹으려고 하는데 (생각보다 무지 어려워서 매번 실패한다.) 비싼 고기는 애초에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달걀이나 두부, 콩, 견과류 같은 걸로 채운다. 채소를 좋아하는데 제철 채소는 값이 싸고 특히 요즘 같은 초여름에는 더 싸다. (오늘도 양배추 한 통을 2천 원 주고 사 왔다.) 사과도 하루에 한 알씩 챙겨 먹으려고 하는데 이건 좀 비싸다. 인터넷에서 농부가 직거래하는 못난이 사과를 사는데 이마저도 비싸지고 있다. 기후위기로 생산면적이 줄어든 게 원인 중 하나라는데, 기후위기는 백수에게도 재정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나쁜 놈이고 그 기후위기를 야기시킨 우리 인간들은....
그렇다고 내가 맨 끼니를 건강하게 먹느냐면 그건 절대 아니다. 피자도 사 먹고 떡볶이도 사 먹고 아주 아아아주 가끔 짜파게티도 끓여 먹는다. 또 하나 빼먹지 않고 챙겨 먹는 게 있다면 그것은 빵이다. 난 빵순이가 아니다. 아니, 아니었다. 근데 2년 전 이사 온 이 동네에 너무나 맛있는 예술의 빵집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수천만 원어치를(과장인 거 알죠?) 사들인다. 다행히 통밀빵이나 사워도우 같은 상대적으로 건강한 빵들을 주로 사 먹는다. 다른 빵들도 정말 다 너무 맛있지만.... 최대한 절제한다. 이 집 빵은 오늘도 먹고 어제도 먹고 그제도 먹었다. 내일 또 사러 갈 거다.
ㅇ 운전
작년 이맘때쯤 아빠가 타던 똥차를 인수했다. 굴러만 가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인수했는데 타다 보니 고칠 게 너무 많았다. 이것저것 수리하다 보니 합쳐서 거의 2백만 원은 쓴 것 같다. 아, 보험까지 합치면 훨씬 더 되는구나.... 그때만 해도 직장인라 탈 일도, 탈 시간도 거의 없어서 주말에 동네 다닐 때만 (특히 그놈의 빵을 사러) 연습 삼아 타고 다니곤 했다. 한데 이제 나는 직장인이 아니다. 고로 남들 다 회사 간 평일 대낮에, 그러니까 도로가 나름 뻥 뚫려있고 퇴근 시간 전에만 돌아오면 주차 자리도 여유로운 시간에 운전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차에 쏟아부은 돈과 눈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여기서 그만두면 억울하잖아? 또 너무 장기간 운전을 안 하면 배터리가 방전될 수도 있고 (이미 수차례 방전됐다.) 기껏 익힌 운전 감각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하여간 그런저런 핑계로 차를 열심히 몰고 다니고 있고, 운전 반경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내가 사는 서울 북부에서 부모님이 사는 경기 최남부까지, 친구가 사는 경기 최서부까지, 면접을 보러 충청도까지.... 백수 주제에 뚜벅이로 다닐 것이지 비싼 기름값을 충당하는 건 부담스럽고 주제넘지만... 운전의 편리함을 알아버린 이상 이전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다. 짐이 너무 많은데 어떡하겠는가? 차로 1시간이면 갈 거리는 수백만 번의 환승을 통해 3시간에 걸쳐 가기란 너무 진이 빠지는데? 그 고생을 해서 드는 병원비가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위로해 본다.
ㅇ 나름의 효도하기
오늘 아침 아빠가 전화해서 말했다. "죽염이 다 떨어졌다." 주문하란 소리다. 죽염이라면 불과 3개월 전에 1kg인가를 주문해 줬는데, 대체 죽염으로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벌써 다 썼단다. 어쩌겠나. 주문해 줘야지.
평생 소금이란 걸 사 본 적이 없어서 소금이란 게 이렇게 비싼 건지 몰랐다. 특히 죽염은 그렇다. 제일 싼 게 1kg에 3만 원이 넘는다. 1회 죽염 3회 죽염 뭐 그런 게 있던데 그 횟수가 높아질수록 고가가 된다. 고작 60g에 3만 원이 넘는 고급 죽염도 있다. 소금의 세계란.... 아빠에게 용도를 물어보니 물에도 타 먹고 이도 닦고 채소도 절이고 하는 다용도라 많이 비싼 건 필요 없다고 해서 (아빠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로 많이 비싸지 않은 걸로 주문했다.
엄마와 아빠 두 분 모두 나이가 많고 아프다. 특히 작년에는 고비를 많이 넘겼다. 그래서 늘 아쉽고 조금이라도 더 잘해주고 더 사주고 싶은데 효도라는 게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다. 이번 주까지 제출해야 하는 지원서만 마무리하고, 차에 기름을 빵빵하게 넣은 후 마트에 들러 아빠가 좋아하는 (엄마는 현재 못 드신다) 족발이랑 연어를 잔뜩 사가지고 가야겠다.
이렇게 포기 못하는 것들도 많지만, 포기하거나 줄인 것도 많다.
가장 큰 게 술. 회사를 다닐 땐 거의 매일 와인을 반 병 이상, 어쩔 땐 한 병까지 마실 정도로 거의 알코올중독자였는데 지금은 '그땐 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마셨지?'하고 의아해할 정도로 안 마신다. 술을 마신 원인이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였기 때문에, 그 원인이 사라진 지금 술이 더 이상 '필요재'가 아니게 되었나 보다. 지금은 술을 안 마신 지 거의 6개월이 되어간다. 발이 아프기 시작해서 괜히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안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에 더해 백수 생활이 시작됐고, 술 때문에 생활이 더 불규칙적이고 무분별해질까 봐 술병에 함부로 손을 못 대겠다. 남편도 술을 끊은 지 3년이 넘어가기 때문에 집에 사다둔 와인과 각종 술들은 먼지만 켜켜이 쌓인 채 썩어가고 있다. 예전엔 마트에 들르면 습관처럼 와인 코너에서 한참을 어슬렁거리곤 했었는데 요샌 쳐다도 안 본다. 내가 이렇게 되다니. 나도 신기하다.
책도 사고 싶은 만큼 못 산다. 아 이건 어쩔 수 없잖아.... 하고 이따금 사는 책이 있긴 하다. 대신 도서관을 이용한다. 도서관에는 없는 책이 없다. 우리나라 도서관 짱이다 만만세다. 대신 출판 시장의 활성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왠지 모를 책임감이 있기 때문에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욕심부려서 잔뜩 빌려놓고 못 읽고 반납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다 읽고 반납하는 책들보다 많을 거다) 도서관의 대출 횟수도 출판시장에 (크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된단다. 영국이나 캐나다에서는 공공 대출권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도서관 대출 횟수에 따라 저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한다던데, 우리나라도 이런 제도 도입을 검토를 해보면 좋겠다.
커피숍도 잘 안 가게 됐다. 회사에 다닐 때는, 그리고 백수 초기 시절에는 집에서는 절대로 글이 안 써졌었는데 이제 어느 정도 극복했다. 아마 커피숍 가기 위해서 씻어야 하고, 옷을 입어야 하고, 걸어야 하고, 자리를 잡아야 하고, 커피를 주문해야 하는 귀찮음이 어느 정도 작용을 한 것 같다. (귀찮음에는 사실 대단한 힘이 있다.) 그리고 트위터에서 한 때 화제가 됐던 'KMN 작업법'도 큰 도움이 됐다. 번역가 김명남 님이 공유한 작업법인데, 40분 동안 작업을 하고 20분 동안 쉬는 방법이다. 작업을 하는 40분 동안은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한이 있어도 인터넷을 하거나 자리에서 뜨지 않는다. 대신 20분 동안은 뭘 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왠지 집안일을 하게 되어서 집이 살짝 깨끗해지는 부수 효과도 얻었다.
며칠 전부터는 허리 때문에 누워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겠다고 하도 앉아있었더니 발이 붓기 시작해서 웬만하면 앉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그래도 글은 써야 하기 때문에 누워서 쓰기로 했다. 그 때문에 커피숍을 더더욱 안 가게 됐다. 커피숍에서 누워서 글을 쓸 수는 없으니.... 올해 초반에 허리가 안 좋을 때 누워서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거치대를 샀는데, 지금 이 글도 그 거치대에 노트북을 끼고 누워서 쓰는 중이다. 거치대를 몸에서 빼내기가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에 40분 동안 정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한다는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