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 일기 6
이번 퇴사는 조용했다. 내가 소리소문 없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회사를 나갔는지 아직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는 마치 카톡방의 '조용히 나가기' 기능을 쓴 것처럼, 연기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한 이유는 첫째, 쪽팔려서다. 어디 더 좋은 자리 취직되어서 이직하는 것도 아니고, 정년이 되어서 은퇴하는 것도 아니고, 계약 만료로 나왔다. '계약 만료로 인한 퇴사'는 사실 좀 점잖은 표현이고 다른 말로 하자면 잘린 거다. 굳이 자랑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둘째, 감정노동하기 싫어서 그랬다. 퇴사한다고 인사를 하러 다니거나 이메일을 써서 돌리는 것도 감정노동이다. 그런 거 하고 싶지 않다. 퇴사하는 마당에 굳이 왜? 그리고 인사를 받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줘야 한다. 잘려서 나간다고 잘 계시라고 인사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대꾸해야 한단 말인가? 곧 좋은 데 취직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해야 하나? 당신 같은 능력쟁이를 팽한 이 회사는 바보 멍청이라고 회사 욕을 해야 하나? 자주 연락하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정말 연락할까 봐 걱정해야 하나? 정말 곤란할 테다. 서로가 피곤한 일이다.
셋째. 그냥, 내 성격 탓이다. 회사에서 일적으로 만난 사람도 다 인맥이라고, 관리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에 미련이 별로 없다. 인맥 쌓기 친구 관계 유지하기 그런 거 잘 못하고 별로 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난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중에 도움이 될지 몰라서 관리하고 연말연시마다 문자라도 보내고 그런 거.... 전혀 안 하고 솔직히 필요성도 잘 못 느끼겠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그냥 스타일이 다른 거다. 나는 거미줄같이 엉키고 설킨 인간관계를 다 부여잡고 정성스레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거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즐거운 사람들인 거고, 나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면 정신이 나가는 사람인 것이다. 이렇게 살면 늙어서 후회한다고 하던데.... 늙어서도 주위에 사람이 많은 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하니까. 근데 아무리 노인이 되어서도.... 내가 싫은 사람과 노는 건 싫지 않을까? 싫은 사람과 억지로 노는 게 정신건강에 더 유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노인이 되어서 친구가 많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싫은 사람과 억지로 노는 건 좀 오버 아닐까? 이렇게 살다가 쓸쓸한 노인이 되어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미래의 나야.
그렇다고 내가 친구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따져보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친구가 더 많다. 다만 내가 사람을 너무 골라 만나는 탓에(물론, 타인들이 나를 거르는 경우가 더 많을 테지만) 양적으로 많지는 않다. 그래도 한 회사에서 한 명이라도 연이 이어진다면 선방 아닌가? 마음이 맞는 사람, 회사 얘기가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안 좋은 일에만 (속으로는 약간 고소해하며) 위로해 주는 게 아니라 좋은 일에 진심으로 기뻐해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회사 때문에 굳이 만나야 했던, 굳이 얼굴 마주 보고 지지고 볶아야 했던 사람들을 더 이상 안 만나도 된다는 게 퇴사, 혹은 실직의 몇 안 되는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도 있겠다. 세상에는 정말 온갖 인간군상이 있구나, 깨닫게 해 준 사람들을 회사에서 많이, 정말 많이 만났다. 인간의 욕망, 치졸함, 지질함, 치사함, 어처구니없는 우월감, 온갖 차별의식, 인정욕구, 열등감, 나약함 등등을 1열에서 직관할 수 있게 해 준 사람들. 그래. 고맙다면 고맙다. 잘 살아라. 다음에는 내 소설의 이상한 인물 캐릭터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