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 회사가 자꾸 꿈에 나온다.

실직일기 4: 전 남친도 아니고 말이야

by 두지

회사를 나온 지 한 달이 됐다. 그동안 회사 꿈을 세네 번은 꾼 것 같다. 전 남친도 아니고 전회사가 왜 자꾸 꿈에 나오는 거야? 나한테 미련 있니? 아니, 내가 미련이 있나? 소중한 수면 시간에 찾아와 나의 정신을 방해하다니. 꿈꾼 시간을 시급으로 계산해서 청구하고 싶다.


#


첫 번째 꿈은 회사를 나온 지 일주일 정도 후에 꿨다. 꿈에서 나는 회사 동료 두 명과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한 명은 다른 팀 팀장. 다른 한 명은 다른 팀 팀원. 두 명 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밥을 먹는, 그렇게 친하지는 않지만 서로 일적으로는 괜찮게 생각하는 그냥 그런 관계의 사람들이다. 셋이서 뭉쳐본 적도 없고 뭉칠 일도 전혀 없는.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둘이 캐스팅되어 내 꿈에 나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긴, 꿈에는 친한 사람들은 잘 안 나오고 딱 이 정도, 이도 저도 아닌 관계의 사람들이 잘 등장하더라.


꿈의 배경은 회사 옆 가끔 가던 베트남 식당. 둘은 벽 쪽에 앉아있고 나는 그들을 마주 보고 앉아있다. 쌀국수를 먹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내가 말했다.


"아. 몰랐어요? 저 계약 만료돼서 앞으로 안 나와요."

나의 말에 둘의 얼굴 표정이 싸하게 변하더니 목을 컥컥거렸다. 둘이 고개와 허리를 푹 숙였다. 내 눈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과장된 몸짓으로 엉뚱한 곳을 자꾸 두리번거렸다. 내가 불편하게 했구나. 나의 실직이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구나.


#


두 번째 꿈은 정말 자존심 상하는 꿈이었다. 나는 출근해 있었다. 계약이 만료되었었는데 뭔가 다시 결정이 내려져서 그냥 다시 일하는 것으로 된 설정이었다. 나는 어물쩍 저물쩡 원래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를 켜고 밀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도 찝찝했다.


꿈은 욕망의 반영이라는데. 전회사에 되돌아가기를 욕망한다는 건가? 솔직히 욕망하지 않는다고는 못한다. 실직 상태로 있을래 고용 상태로 있을래? 물어보면 당연히 고용 상태로 있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까. 꿈에서처럼 정말 다시 전 회사로 돌아갈 수 있다고 결정되면 돌아갈 거야?,라고 묻는다면.... 안 쪽팔리겠어? 괜찮겠어?라고 묻는다면.....


돌아가겠다고 하겠다. 못 이기는 척은 조금만 하겠다. 좀 쪽팔린 건 있겠지만 그게 대수인가. 지금 하고 있는 재취업 시도가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다. 이력서 내고 면접 보고 떨어지고 또 이력서 내고... 으악.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다시 들어오라고 할 리가 없잖아. 자리가 나서 내가 지원하고 합격하지 않는 이상... 정말 자존심 상하는군....


#


세 번째 꿈은 회사에 무언가 챙기러 간 꿈이었다.


현실의 나는 이미 짐을 싹 다 버리고 챙겨 온 지 오래다. 그런데 꿈에서의 나는 하필 계약 만료 마지막 날, 하지만 남은 연가를 썼기 때문에 안 나가도 되는 날, 출근하여 내 원래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것도 아침 8시 50분에. 사람들이 하나 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파티션이 높아서 내가 와서 앉아있는지 다들 눈치를 못 채는 분위기였다. 혹은 내가 거기 있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 내가 실직을 한 걸 까먹은 걸 수도. 그러던 중 팀장이 출근했다. 팀장의 머리 꼭대기가 파티션 사이로 스스스, 지나가는 게 보였다. 꿈속에서 나는 고민했다. 팀장한테 가서 인사라도 해야 하나? 뭐라고? 연가 잘 쓰고 왔다고? 뭐 하러? 연가 잘 쓰고 왔으니 이제 열심히 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연가 잘 쓰고 왔고 이제 가보겠다고, 앞으로 영영 못 볼 테니 잘 살라고 인사해? 그냥 앉아있자. 아니지... 그냥 앉아있다가 내가 있는 거 발견하면 어떡해? 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지금 이 상황에서 예의가 중요해? 근데 나 왜 아침에 온 거야? 6시 지나고 사람들 다 퇴근한 느지막한 시간에 잠깐 왔다 갔어도 됐잖아. 왜 하필 출근 시간에 와서. 바보! 바보!


그렇게 자책하다가 깼다.





정말 자존심 상하지만 인정한다. 미련이 있다는 걸. 미련이 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나가겠다고 제 발로 나온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내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팽해버린 건데. 연인 관계로 치자면 차인거지. 찬 사람은 몰라도 차임 당한 사람은 미련이 없을 수 없지 않은가.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힌다고, 전 회사는 다른 직장으로의 재취업으로나 어느 정도 잊히겠지. 그게 언제일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만.




♫ 하림 -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https://www.youtube.com/watch?v=VOpo678RxKU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3화회사 안 다니고 돈 버는 법을 궁리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