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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모범 답안 (feat. 실제 속마음)

실직 일기 9

by 두지

실직한 지 두 달이 가까이 되었다. 지금까지 9군데에 서류를 넣었고 5번의 면접을 보았으며 1군데는 다른 데랑 겹쳐서 못 갔고 3군데는 서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떨어질 거면 차라리 서류부터 안 되어서 면접을 안 보면 좋으련만, 굳이 서류는 또 되어가지고 면접을 꾸역꾸역 가고 있다. (물론, 서류까지 안되면 더 큰 절망에 빠질 것이다.) 첫 면접을 보러 갔을 땐 꼭 되었으면 싶었다. 첫 면접이 되면 다른 면접을 안 봐도 되니까. 근데 그럴 리가 없었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왜 자꾸 떨어지나? 자랑은 아니지만, 신입 때 빼고는 거의 매번 처음으로 지원한 회사에 붙어서 면접을 자주 보러 다닐 필요가 없었다. (자랑 맞나?) 아마 나이가 들어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여자여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나보다 경력과 실력이 화려한 사람이 널리고 깔렸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가면 갈수록 면접에 더 가기 싫다. 꼭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도 사라졌다. 왜냐면 어차피 안될 거니까. 굳이 가야 하나? 이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가면서? 나의 경우 면접 준비에 들어가는 시간은 서류 준비에 들어가는 시간보다 더 많다. 즉흥적으로 답변을 하려고 하면 말이 꼬이고 엉뚱한 소리를 해버릴까 봐 예상 질문을 최대한 많이 뽑아서 답변을 준비해 가는 편이다. (그런 방식은 안 좋다고, 마치 재즈 하듯이 면접위원과 티카타카를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는데, 그냥 사람마다 더 맞고 덜 맞는 방식이 있는 것 같다.) 그 과정이 너무 지난하고 지겹고 귀찮다. 준비를 하다가 너무 하기 싫어서 침대에 누워 또 생각한다. 왜 해야 하지? 어차피 떨어질걸? 하지만 안 할 수는 없다. 서류 준비에 들인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고, 만에 하나 될 수도 있으며, 계속 백수로 살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접 준비란 너무 하기 싫은 것이고 면접이 얼마나 싫은지, 왜 싫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란 나름 흥미롭기 때문에 나는 계속 침대에 누워 면접이 싫은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나는 그 면접이라는, 그 작위적이고 형식적인 과정 자체가 싫다. 뻔한 질문에 뻔한 답변, 해서는 안 되는 답변, 모범적인 답변이라는 수많은 틀과 룰. 진정성이 없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진정성 있게 느껴지도록 해야 하는 슬픈 연극. 물론 애초에 진짜 자신이 멋져서 진정성 있게 했고, 그래서 그 진정성에 면접위원이 감동받아 합격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 슬프게도 그게 나는 아니다. 나는 애초에 멋지지도 않고 모범답변을 하나하나 작성해 달달 외워가야 하는 사람이다.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마음속 깊은 저 구석에 잘 숨겨놓은 채로.





면접 모범 답변과 실제 속마음을 적어봤다. 아 물론, 이게 진짜 '모범' 답변이라고 생각해서 참고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최근 실직 이후 백전백패했던 답변이니까.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모범 답변

안녕하십니까. 저는 00 분야에서 00년간의 경력을 쌓아온 00 전문가입니다. A회사에서는 이걸 했고 B회사에서는 이걸 하면서 경력과 실력을 쌓아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신네 회사의 00 분야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기여하겠습니다.


A. 속마음

글쎄요. 저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제가 ㅇㅇ분야에서 수년간 일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저를 전문가라고까지 칭할 수 있을까요? 좀 오버 같은데.... 그리고 ㅇㅇ분야에서 오래 일했다지만 제가 그쪽에 대단한 열정이 있는 건 사실 아니에요. 그냥 먹고살아야 하는데 뽑는 분야가 그런 거다 보니.... 아. '내가 누구냐'가 질문이었죠?

음.... 근데 면접 위원님들은 아시나요? 자신이 누구인지.... 그건 뭔가 평생에 걸쳐서 탐구하고 연구해 나가야 할 주제 아닌가요? 그리고 어떤 시절의 내가 누군지를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나'는 바뀌어 있을 것인데... 그래도 이건 면접이니까, 경험과 관심분야를 위주로 말씀드리는 게 낫겠죠? 저는 먹고살자고 일을 그래도 꽤 오래 해왔는데 중간에 뭉텅이 시간을 쉬면서 여기저기 여행도 엄청 많이 다녔어요. 그러니까.... 회사 다니는 일은 제 삶의 '센터'였다고 하긴 좀 어렵죠. 그래도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누구지? 난 뭘 하고 싶지? 이 인생이란 건 대체 뭐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해왔는데.... 그런 이후에도 쉽지는 않네요. '넌 누구냐'에 대한 답을 하기란.

근데 여행을 안 다니고 회사를 다니는 기간에도 지속적으로 하려고 노력했던 일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글쓰기 같은 거. 아 이제 그만 좀 짧게 줄이라고요? 알겠어요. 요약하면 전... 글을 쓰고 싶은 직장인이었다가, 실직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글을 쓰고 싶은 백수가 된 사람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다시 글을 쓰고 싶은 '직장인'이 되고 싶냐고요? 사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회사 같은 거 다니기 싫어요. 아, 그만 가보라고요? 알겠습니다 잘 먹고 잘 사십시오.



Q. 회사를 자주 옮기셨네요? 이력서를 보니 벌써.... ㅇㅇ 군데를 다니셨으니 여기를 다니게 되면 ㅇㅇ번째 회사인데... 이유가 있나요? (실제 나온 질문임)


A. 모범 답변

대기업 공채 준비보다는 관심 분야에서 경력을 쌓는 것을 우선순위로 하다 보니 여러 군데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A. 속마음

아니, 몰라서 물어요? 어이없네? 저기요. 여기도 계약직 자리 아니에요? 죄다 계약직만 뽑으니까 내 이력서가 이렇게 더러워진 거 아니야! 정규직 뽑으면서 그런 소릴 하든가!



Q. 어려운 일을 극복해 본 경험이 있나요?


A. 모범 답변

ㅇㅇ회사에서 일할 때 ㅇㅇ행사를 준비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ㅇㅇ때문에 어려움이 있었고 ㅇㅇ로 극복했습니다.


A. 속마음

지금 바로 이 순간이요. 면접을 보는 이 순간. 저는 면접이 너무 어렵고 싫거든요. 아. 근데 어려운 일을 '극복'해 본 경험이라고 하셨구나.... 이 면접도 떨어질 테니 '극복'은 아니겠네요. 극복 사례 좀 만들어보게 좀 뽑아주실래요? 아 근데 뽑아주면 일을 해야 하고 그러면 계속 그놈의 어려운 일을 극복해야 하는구나.... 그건 또 싫은데.... 그렇다고 계속 백수로 살 순 없고. 아 참 어렵네요. 밥벌이란.



Q. 자신의 장단점은?


A. 모범 답변

장점은 몰입을 잘한다는 점입니다. 단점은 가끔 지나치게 몰입한다는 건데, 선후경중을 따지며 조정하는 노력을 해오고 있습니다.


A. 속마음

사실 몰입 잘 못해요. 집중하기 너무 힘들어요. ADHD가 있는 걸까? 하는 의심을 할 정도예요. 회사 일은 급한 게 있고 마감이 있고 퇴근을 해야 하니까 집중하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집에서 일할 때는 집중력이 진짜 딸려요. 그래서 요새는 KMN 단위로 작업하는 습관을 기르고 있어요. 40분 일하고 20분 쉬는 걸 하루에 수 번 반복하는 방식인데, 목표난 8 단위를 하는 거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건 쉽지 않아서 최소한 4 단위 이상은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 관심 없다고요? 근데 면접 위원들도 예의 좀 차리면 안되나?

장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 혼자 노는 거 잘해요. 며칠 동안 집 밖으로 안 나갈 수 있어요. 읽을 책과 자판을 두드릴 노트북만 있으면 몇 날 며칠 아무도 안 만나도 돼요. 아니, 그러는 편을 오히려 더 좋아해요.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백수로 지내면서 하루에 KMN 4 단위 이상 글을 쓰는 이 상태가 딱 좋은데....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걸까요?

그리고 저의 정말 큰 장점이 있는데. 잘 걸어요. 정말 잘 걸어요. 지금은 허리와 발에 문제가 좀 생겨서 무리하면 안 되기는 하는데... 한 때는 하루에 30km 이상 걷고 그랬어요. 국토종단도 하고 히말라야 종주도 하고 이스라엘 종주도 했어요. 취직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요? 알아요! 안다고!



Q. 이 회사에 들어온다면 해보고 싶은 일은?


A. 모범 답변

ㅇㅇ분야를 전략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도록 ㅇㅇ 등과 협력하여 ㅇㅇ과 같은 프로그램을 기획해보고 싶습니다.


A. 속마음

사실 안 들어가고 싶어요.... 회사 다니기 싫어요.... 먹고살려고 취업하는 거야. 당신들도 그렇잖아. 뽑지 마... 아냐 뽑아. 아냐 뽑지 말아요... 아냐, 제발 좀 뽑아줘요! 면접 좀 그만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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