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일기 11. 실직하니 불가능해진 것들의 목록
실직을 하니 불가하거나 어려워지는 것들이 많아졌다. 먹고(eat) 사고(buy) 사는(live), 평소에는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 대부분은 사실 사회가 나를 '상환능력이 있는 소비자'로서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게 당연한 자본주의가 너무 싫다!) 그들도 돈 벌어먹자고 하는 짓인데, 내가 그들의 물건을 사주거나 그들에게 돈을 갚을 능력이 의심스러운 상황이라면 서비스를 제공해 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간에 실직자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불쾌하다. 아니 그래도 제가 00년간 00에서 일을 해온 사람인데요? 따위의 항변은 쓸모없고 나를 더 비참하게만 만들 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지금 나의 능력, 그러니까 지금 내가 꼬박꼬박 월급 등의 소득을 벌어들일 능력이 있느냐, 혹은 월급 따위 벌 필요도 없을 정도의 자본이 있느냐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니까.
나는 신용카드를 쓴 지 얼마 안 됐다. 그전까지는 체크카드만 사용하다가 신용카드 발급 이벤트에 낚여 재작년부터 신용카드를 여러 장 발급받고 얼마간 쓰다가 해지하기를 반복했다. 그전까지는 신용카드가 주는 '빚내는 느낌'이 싫기도 하고, 연말정산 때도 체크카드 사용이 환급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해서 체크카드만 써 왔다. 그런데 한 번 신용카드를 써보니 혜택도 많고, 한 달에 한 번만 모아서 결제하면 되고, 캐시백 이벤트도 쏠쏠하고, 체크카드 연말정산도 소득공제도 어차피 총급여의 25% 이상을 사용해야 가능한 거라고 해서 상반기에는 신용카드 위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 직장 다닐 때의 얘기다.
실직을 한 후에는 체크카드 위주로 사용한다. 신용카드를 쓸 때와 체크카드를 쓸 때의 소비 지출 절감에서의 차이는 크게 없는 것 같지만, 체크카드를 쓸 때 '돈 쓰는 느낌'과 잔고가 바로바로 줄어드는 느낌이 팍팍 나서 소비할 때의 죄책감이 더욱 느껴지기는 하다. 아직 가지고 있는 신용카드들도 모두 해지해버리고 싶은데 그러지는 못하고 있다. 조만간 직장을 구하지 못할 확률이 크고, 그러면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싶어도 못 받거나, 매우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카드사는 카드대금 상환이 가능한 사람들에게 카드를 발급해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직장이 없으면 발급을 거절할 가능성이 크다. 신용점수가 높거나 차 소유 등을 담보로 발급받는 방법이 있다고도 하고, 묻지 마 식으로 발급해 주는 데도 있다고는 하던데 굳이.
카드사 입장도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도, 카드값을 상환할 능력이 안 되는데 카드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거나 새로 발급받는 일은 삼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학자금 대출 외에는 대출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대출도 내 자산과 능력이라고, 대출을 잘 받아 자본을 증식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됐고, 나는 빚지는 게 싫다.
근데 이제 실직을 했으니 빚을 지려고 해도 못 진다.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은행은 연체를 싫어하는데, 소득이 없는 사람은 연체를 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대출을 안 해준다. 소득이 없어도 신용카드를 엄청 많이 쓰면 대출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는데 그건 또 신용카드 발급에서 막힌다. 이미 가지고 있는 신용카드를 자주 쓰는 방법도 있긴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주택 따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 나에게는 다른 세상 얘기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서 시행하는 전세금안심대출이 있다. 나 같은 취업준비생이나 프리랜서 등 정기적인 소득이 없는 사람도 일정 조건만 충족하면 HUG의 보증을 받아 전세금의 80~100%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근데 이번에 제도가 개편되면서 전세보증금 규모뿐 아니라 임차인의 소득 등 상환능력까지 심사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단다. 전세대출보증 한도도 100%에서 90%로 변경된다. 유보한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2025년 6월 13일부터 시행하려던 제도를 고작 일주일 정도 늦춰 19일부터 시행하는 게 그 유보다. 유보의 이유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 배드 뉴스를 알려줄 시간과 시스템을 구축할 시간이 필요해서다.
좀 이해가 안 된다. 전세금안심대출은 정부에서 하는 서민을 위한 대출 제도가 아닌가? 근데 돈 없고 소득이 불안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출을 더 어렵게 만든다니.... 월세를 살아야 하나? 그럼 소득은 더 줄고 대출은 더 늘어날 텐데? 어쩌라는 거야?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된다. 잘 먹고 잘살아라!)
아무튼 재취업 전까지는 이사도 마음대로 못 간다. 전세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도 직장이 없으면 그땐 어쩌지....
전 직장을 다닐 때 회사에서 단체 보험을 들어줬다. 평생 병원이라고는 사랑니 뺄 때 정도 가보고 감기도 잘 안 걸리던 내가 작년과 올해 자잘한 것들로 병원을 들락거리게 됐는데 이때 단체보험 덕을 좀 봤다. 실직을 해서 그 단체보험이 사라졌고, 나이가 들어 병원 갈 일이 잦아지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데 나만 없는 실손보험을 하나 들어야겠어서 보험 창구를 찾아갔는데 신청서에 '직업'을 쓰는 란이 있었다. 아뿔싸 싶었다. 실직하기 전에 들었어야 하는데....
하지만 난 주눅 들지 않는다. 창구에 당당하게 물었다.
"현재 무직인데 무직이라고 쓰면 되나요?"
"그러면 거절당하세요. 기혼이시면 '주부'라고 쓰세요."
주부? 국어사전에서 '주부'를 검색하면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이라고 나온다. 살림? 그런 거 전혀 안 하는데. 안주인? 그럼 바깥 주인은 따로 있나? 갑자기 구차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구차한 말이 튀어나왔다.
"근데 한 달 전까지 직장이 있긴 했는데...."
"그런 건 전혀 상관없고 현재 상태가 중요해요. 현재 상태가 무직이시니까 '주부'라고 쓰세요."
결국 직업란에 '주부'라고 썼다. 그리고 청약을 거절당했다.
휴대폰 구매 시 구매하려는 모델이 고가이면 신용도나 소득에 따라서 구입이 거절될 수도 있단다. 렌터카의 경우도 일정 기간 이상의 렌트라면 재직증명서나 소득서류 요청받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해외에 나갈 때도 주의해야 한다. 입국 서류에 당당하게 '무직'이라고 쓰면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뭐라도 쓰는 게 좋다. 난.... 소득은 없지만 어쨌든 이렇게 글을 조금씩 쓰고 있으니 '작가'라고 써서 입국 서류에서라도 꿈을 이뤄보겠다.
면접을 볼 때도 공백기가 너무 길어지만 쓸데없는 해명을 만들어가야 한다. 공백기가 3년이 넘어가면 지원 자체가 불가능한 곳도 있더라.
그 밖에 오래간만에 연락해 온 지인이 "요즘 뭐 해?"라고 할 때 할 말이 없어진다. 물론 "어 나 요새 놀아~"라고 당당하게 말해도 되지만 그러면 '백수 = 시간 많음'이라는 편견 때문에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지인을 만나야 할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쉰다니 부럽다~"라든가 "마흔 넘어서 면접이라니 웬일이니"라는 대체 내게서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는 말들을 들어야 할 수도 있다.
백수라 가능해진 것들도 있다.
부모님 댁에 자주 가기. 지금 이 글도 부모님 댁 침대에 엎드려 쓰고 있다.
점심 특선 먹기. 점심에는 1인당 만원 이상은 저렴한 뷔페에 가서 여유를 부리며 하루치 음식을 죄다 먹어버리거나, 늘 먹어보고 싶었지만 평일 점심에만 하는지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동네 식당의 점심 특선을 먹을 수 있다. 돈이 드니 자주는 못하지만.
요리를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요리는 요리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계란 삶기, 고구마를 에어프라이기에 돌리기 정도이지만.... 여하튼 나름 건강식으로 해서 먹을 시간과 여유가 된다. 이런 식으로 식비를 좀 줄여야 할 텐데. 아직 정신을 못 차려서 외식과 배달을 아예 끊지는 못했다.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평일 대낮에 전시를 보러 가거나 여행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백만가지 일을 하는 백수라 바빠서 올해 초에 예매해 둔 전시도 못갔지만.
주차도 용이해진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평일 퇴근 시간 이후면 주차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차가 많다. 고로 지금은 가급적 골라서 주차를 해도 될 정도로 주차 공간이 널널해지는 평일 낮에 돌아와 주차를 하거나, 일렬 주차를 해놓고 다음 날 사람들이 차를 죄다 빼면 주차를 다시 한다.
이것저것 쓸데없는 짓을 할 시간이 많아진다. 그래서 이렇게 브런치 연재도 할 수 있고, 남편이랑 영화 작업도 할 수 있고, 이런저런 글도 써볼 수 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백수의 최대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