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일기 14 수입은 제로, 지출은 그대로
실직을 한 후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월급, 즉 수입이 사라졌다는 거다. 그럼 그만큼 지출도 줄어들었나? 오늘을 기점으로 딱 한 달 동안 쓴 소비 내역을 정리해 봤다.
관리비 등 집세 227,640원
식료품 및 생필품 499,623원
외식 551,460원
교통비 (교통카드, 주유, 주차비 포함) 165,600원
자동차세 74,550원
통신비 등 40,100원
의료보험 및 의료비 43,700
취업준비비 118,400원
에어컨 수리비 148,000원
촬영비 268,500
문화생활비 47,540원
= 총액 2,185,113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회사 다닐 때 한 달에 얼마나 썼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돈을 못 버는 인간의 특징이다. 자기가 얼마 벌고 쓰는지도 모른다.) 대략 지금 이 정도, 200 내외로 썼던 것 같다. (카메라 장비 같은 걸 구매하거나 차 수리를 했던 달에는 300-400까지 쓴 적도 있었던 것 같지만.) 하긴 줄어들 리가 없다. '이제 백수니까 돈을 아껴 써야지, 불필요한 지출은 줄여야지, '라는 생각은 늘, 정말 늘 한다. 자신이 싫어질 만큼 한다. 하지만 직장인으로 소비생활을 해 온 수년이 있는데 그게 쉽게 고쳐질 리가 없다. 직장인일 때 그렇게 흥청망청 썼던 것도 아닌 것 같고...
아니 근데 아무리 굳어진 소비 습관이 있다고 해도, 밖에 잘 나가지를 않는데 소비가 조금은 줄어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한 50만 원 정도라도? 일단 출근을 하지 않으니까 교통비가 줄어야 할 거 아닌가? 회사 다닐 때는 점심때마다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사 먹어야 했었으니, 외식비도 어느 정도는 줄어들어야 맞는 거 아닌가? 거기에 더해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한 'ㅅㅂ' 비용도 좀 줄어야 할 테고. 게다가 나는 이제 술도 안 마시는데!
하여간 지금 이 소비 수준이 지속된다면 마이너스다. 수입이라고 하기에는 좀 뭣하지만 그래도 다달이 들어오는 금액이 있는데 그건 바로 실업급여. 그게 200 조금 안되는데 200을 훌쩍 넘게 썼으니 (내가 모르는, 확인 못한 지출도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게 쌓이면 계속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모으지는 못해도, 마이너스는 안되어야 할 텐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각 항목별로 뜯어보겠다.
외식비
551,460원
가급적 집에서 해 먹고 외식은 자제하겠다는 다짐은 늘 한다. 근데 점심은 집에서 해 먹는다고 해도 저녁까지는 그렇게 잘 안된다. 하루는 그렇다고 해도 그다음 날까지 주야장천 집에서 밥을 해 먹기는 어렵다. 특히 내가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이라고는 삶은 달걀과 상추를 찢어서 대충 만드는 샐러드, 그리고 빵집에서 사 온 빵을 에어프라이어에 구워서 먹는 것 정도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점심 저녁을 매일 연명해 나가는 건 좀... 힘들다. 특히 이렇게 더운 날씨에 에어컨도 없이 불 앞에서 무언갈 끓이거나 구우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냥 차라리 안 먹는 것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카드내역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사실 '외식'이라고 할 만한 것도 별로 없다. 김밥, 버거킹, 서브웨이... 이런 걸 포장해서 집에 가져와 몇 끼에 나눠 먹은 게 거의 대부분이다. 게 중에 '맥도날드'가 많이 보이는데 그건 최근의 미친 더위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창문형 에어컨이 하나 있는데 이번 집으로 이사 온 이후 창문에 안 맞아서 잘 안 썼더니 고장이 났다. 그래서 올해로 3년째 선풍기로 버티고 있다. 지난주에는 너무 덥고 미칠 것 같아서 밤마다 24시간 영업하는 집 근처 맥도날드로 피신을 갔다. 가서 1천 원짜리 아이스커피를 시켜놓고 앉아있다가 심심하니까 2천 원짜리 맥너겟도 먹고.... 2천 원짜리 치즈버거도 먹고.....
좀 줄일 순 없을까? 물론 할 수 있겠지. 집에 현미와 렌틸, 귀리 등이 쌓여있으니 그걸로 저속노화밥을 지어다가 삼시 두 끼 (난 두 끼만 먹는다.) 주야장천 그것만 먹는다면 한.... 30만 원은 아낄 수도 있겠지. 근데 '오늘은 좀 맛있는 거 먹고 싶다.'거나, 어떤 특정한 음식, 예를 들어 샤브샤브나 냉면 같은 거, 그런 게 먹고 싶은데 '에이.... 돈 아끼자'하고 돌아서서 뜨거운 불 앞에서 저속노화밥을 짓고 있자면..... 좀 많이 우울하지 않을까? 그런 우울은 정신 건강에 해롭지 않을까?
식료품 및 생필품
499,623원
이것도 식료품 비용이 대부분이다. 각종 채소, 계란, 요거트, 빵, 탄산수, 뭐 그런.... 줄일 수 있는 거? 글쎄. 빵? 빵도 많이 줄였다. 빵은 우리 동네의 빵천재님 집에서 일이 주에 한 번씩 사는 건데 예전에는 닥치는 대로 다 사서 쟁여놨다면 요새는 건강빵 위주로만 산다. 채소와 계란은 외식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사는 거기 때문에 줄일 수 없다. 탄산수? 탄산수를 궤짝으로 사다 두고 (요즘은 더워서 특히 더) 하루에 수 잔을 마시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마시던 술값에 비하면 훨씬 싼데.... 그래... 탄산수는 (더위 좀 지나면) 줄여보겠다. 아, 이번 달 식료품 비 일부는 병원에서 엄마 간병할 때 내 밥 챙겨 먹느라고 근처 마트에서 반찬을 사는 데 많이 사용했다. 그것도 매번 사 먹는 외식비를 아끼기 위함이었다.
교통비
165,600원 (자동차세 포함 시 240,150원)
주유비 때문에 왕창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주유는 4만 원씩 두 번을 했다. 엄마아빠 집까지 왕복 100km를 자주 다니는데 그 정도면 뭐....
자동차세는 6개월에 한 번 내는 건데 하필 오늘 내서 포함했다. 6개월치 세금이니까 6분의 1만 계산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1년 치를 한꺼번에 냈던 자동차 보험료도 계산에 넣어야 하니까 넘어가기로 한다. (사실... 오늘 자동차보험 갱신을 위해 수개월 전 사고비를 현금으로 냈는데, 그 비용 45만 원은 계산에 포함 안 했다.)
줄일 수 있는 거? 있다.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다면, 아니, 차를 아예 없애버린다면 교통비가 확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짐을 들고 왕복 100km를 대중교통을 타고 갈아타고, 또 갈아타서 가다가는... 발병 나서 의료비가 더 들 것이다.
취업준비비
118,400원
취업 준비를 하는 데는 돈이 든다. 지원서를 낼 때 수수료를 내라고 하는 곳들도 있어서 그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 그런데들은 다 등기우편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편비도 든다. 자잘하긴 하지만 인쇄비도 든다. 그리고 교통비. 이번 달에는 기차와 버스를 타고 3시간 정도 걸리는 지방 도시에 면접을 보러 왔다 갔다 하느라 그 교통비만 71,600원이 들었다. 딱 한 군데에서 '면접실비'라고 5만 원을 지급해 준다고 했는데,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사람은 지급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나만 받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월급 받고 있고 정작 지원이 필요한 건 난데! 정말 너무 억울했다.
다행히 면접복 세탁비는 아끼고 있다. 블라우스는 드라이를 맡기는 대신 손으로 빨고 재킷은 안 빤다.
에어컨 수리비
148,000원
하필 오늘 에어컨을 수리해서 목돈이 들었다. 에어컨 없이 세 번의 여름을 꿋꿋이 버텨왔는데 지난주를 겪어보니 올해는 더 이상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수리를 불렀고 기사님은 에어컨을 다 뜯어보더니 오랫동안 안 써서 모터가 녹슬어버렸다고 했다. "교체 진행 할까요?"라고 기사님이 물었을 때 잠시 망설였다. 그냥 선풍기로 버틸까? 하지만 매일 밤 맥도날드로 뛰쳐나가는 것도 돈이고 온열질환에 걸려 병원비가 더 들 수도 있으니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모기만 한 소리로 진행시켜 달라고 대답했다. 근데 오늘은 비도 오고 선선하다. 하하하... 아무튼 이 돈은 이제 안 들겠지.
촬영비
268,500
이건 영화 제작에 쓰이는 비용. 이번 달은 촬영이 거의 없었어서 대부분 자잘한 지출이었는데, 하필 오늘 외장하드를 하나 사서 그 비용 20만 원이 포함됐다. 아무튼 촬영 비용은 줄일 수 없는 비용이다.
문화생활비
47,540원
영화 두어 편 보고 책 몇 권 샀다. 고작 5만 원 남짓 썼는데 줄이라고? 문화예술 산업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그럴 수 없다. 오히려 너무 줄여서 부끄럽고 속상하다.
백수 초반에는 대략 이런 계산을 했던 것 같다. '실업급여가 200만 원 좀 안되게 들어오니까,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백수니까, 양심상 100만 원 정도만 쓰고 100만 원은 저축해야지.' 어림도 없는 소리다. 백수에게 저축은 사치다.
그래도 백수인데 너무 많이 쓰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너무 자책하지는 않기로 했다. 실업급여는 대략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받을 때의 금액과 비슷한데, 최저임금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의식주 생활이 가능한 임금이다. 그마저도 지금의 물가와 너무 맞지 않아 현실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많고. 그리고 아무리 백수라도 내수진작을 위해서 소비를 좀 해야 하지 않겠나? 정말 코딱지 만한 돈이지만 외식도 하고, 시장도 가고, 문화생활도 해야 돈이 돌고 그래야 나도 취업하는 거겠지.... 오늘은 에어컨 수리비와 마트에서 산 식료품비, 그리고 하필 오늘 산 외장하드 비용, 주유비와 자동차세까지 해서 50만 원을 넘게 썼지만..... (아... 사고비 현금처리까지 합치면 거의 100만 원...) 잘했어! 기죽지 마! (그리고 내일은 계란만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