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는 물어볼 수 없어서 10.] 오빠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중학생일 때, 엄마 아빠는 장사가 잘 안 되는 금은시계 안경집을 정리하고 같은 자리에 식당을 열었다. 동네에 ‘건강 바람’을 불어넣겠다는 말도 안 되는 포부(그런 게 먹히는 시절도, 동네도 아니었다.)를 가진 아빠는 주 메뉴를 두부와 황태로 정했다.
처음에는 잘 되는 듯했다. 그런데 그건 그냥 처음 연 식당이어서 그런 거였다. 1년이 채 안 돼 가게는 다시 장사 안 되는 가게로 돌아갔다. 문제는 식당 일은 장사가 안 되어도 일이 많다는 거였다. 아빠는 새벽같이 나가 두부를 만들었다. 엄마는 새벽까지 남아 혹시 늦은 시간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다 가게를 정리하고 들어왔다. 길고 예쁘던 엄마의 손이 갈라지고 까만 때가 끼기 시작했다.
“엄마 가게 할 때. 엄청 속상했던 날 있었어.” 오빠가 말했다. 손님 네 명이 와서 황태찜을 먹고 볶음밥을 시켰다. 볶음밥은 2천 원이었다. 가격을 묻는 손님에게 엄마가 2천 원이라고 했더니 손님들이 무슨 볶음밥을 2천 원을 받느냐고 엄청 성질을 내며 뭐라고 했다. 손님들은 가게를 나가면서까지 “볶음밥 2천 원 받고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했다고.
“엄마가 그것 때문에 자존심이 엄청 상했나봐. 돈 받는 거는 메뉴 가격 정해진대로 맞춰서 받는 건데. 그런 소리 들으니까 너무 속상했나 봐. 그 얘기를 나한테 몇 번 했어.” 오빠가 말했다.
“나는 엄마 속상했던 거 그거 기억나. 오후 3시쯤에 전화가 왔는데. 근처 사무실에서 저녁 회식을 한다고 예약을 하고 싶다는 거야.”
내가 말했다. 열댓 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상대방은 카드가 되냐고 물어봤다. 현금을 주로 쓰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카드는 안 된다고 했고 상대방이 그럼 상사에게 물어보고 전화를 다시 주겠다고 했다. 전화가 다시 왔고 상대방은 예약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당황한 엄마가 옆집에 언니가 식당을 하는데 거기서 카드기를 빌리면 된다고 오시라고 했다. (이웃 식당 카드 기계를 쓸 생각으로.) 언니네 식당이라서 괜찮다고, 잘해드리겠다고, 제발 오시라고 거의 사정을 했는데 상대방은 미안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거의 울먹거리며 속상해했다.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오래간만에 받는 단체 예약을 눈앞에서 날려먹었으니.
명절 때 일화도 있다. (엄마가 식당하며 힘들고 속상했던 일화는 파도파도 끝이 없다.) 엄마는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명절에도 친가 친척들에게 가지 않았다. 그 대신 가게를 열었다. 명절 때 여는 식당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늘 손님이 없던 우리 식당에도 그때만큼은 손님들이 들어왔다. 아빠는 친가 친척들에게 가버리고 엄마와 오빠, 나 셋이서 손님들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감당이 안 됐다. 주방 바로 옆 테이블에 남자 세 명이 앉아있었는데 음식이 너무 늦게 나왔다. 엄마와 오빠 사이에 말이 꼬여서 그랬던 것 같다. 한참을 기다리던 남자들은 “뭐 이런데가 있느냐”면서 화를 내며 나갔다. 화를 낼 만했다. 지금 같으면 지도 앱에 별점 테러를 당할 일이다. 그 일로 그날 엄마와 오빠가 서로를 탓하며 다투던 기억이 난다.
다툼은 아빠와 더 자주 했다. 아빠는 밤이면 술을 마셨다. 손님이 있든 없든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렸다. 순하디 순한 사람들의 집에서 자란(2화: 또 딸? 외할아버지는 미역을 내팽개치고 나가버렸다.) 순한 엄마의 마음속은 아빠와 오빠와 나, 그리고 손님들이 던져 놓은 돌멩이들로 시퍼렇게 멍이 들어갔던 것 같다.
엄마가 화상을 입은 일도 있었다. 가게 일을 마무리하는 시간인 새벽 두세 시쯤, 엄마가 집에 전화를 했다. 실수로 발에 뜨거운 물을 부어버렸다고 했다. 내가 구급차를 부르겠다고 하니까 엄마는 그냥 집에 오겠다고 했다. 엄마가 아픈 발을 절뚝거리며 집에 왔다. 너무 아파해서 결국 내가 119를 불렀고 엄마는 들것에 실려 갔다.
“참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됐지. 두부 파는 식당에서 식구들끼리 삼겹살 구워 먹고.” 내가 말했다. 당시 우리 식구는 식당에서 모든 끼니를 해결했는데, 고기를 자주 먹던 식구라 가끔 삼겹살도 구워 먹었다.
“맞아. 고기 냄새 펄펄 풍기면서.”
“우리 식구들도 많이 먹었지만 중국집이랑 감자탕(엄마 아빠가 자주 어울려 놀던 이웃 식당 분들)도 거의 맨날 와서 먹었어.”
그래. 생각해 보면 안 좋고 속상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엄마는 식당을 하면서도 주변 이웃들과 친하게 지냈고, 특히 중국집과 감자탕 내외와는 거의 매일 서로의 가게에 돌아가며 만나 저녁을 먹으며 놀았다. 중고등학생이던 나도 그 자리에 껴서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밥을 먹은 기억이 난다. 대화소리. 웃음소리. 고기냄새. 술냄새. 엄마의 말소리. 웃음소리. 속상하고 힘들었지만 이따금 재밌기도 했던, 엄마의 5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