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는 물어볼 수 없어서 9.] 오빠에게 물어보았다.
“허리 수술받을까?”
리클라이너 소파에 몸을 길게 뻗은 채 누운 (친) 오빠가 말했다. 오빠는 최근 허리디스크가 터져서 제대로 걷지 못하고 절뚝거리며 다니고 있다. 몇 차례 주사를 맞다가 병원에서 시술 권유를 받았지만, 시술이나 수술은 좀 고민해 보기로 하고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 노력이라고 함은, 가능한 누워있기.
“허리 시술이나 수술은 웬만하면 하지 말라던데.”
내가 어서 주워들은 말을 지껄인다. (오빠의 경우) 시술을 하지 않으면 자연치료까지 반년에서 일 년을 기다리면 된다. 오빠가 고민하는 건 시간이다. 시술을 받지 않으면 그만큼 오래 걸리는 시간 동안 아내가 독박육아를 해야 한다는 거.
안방에서 아기가 울기 시작한다. 조카는 5개월 전 태어나 얼마 전 백일을 맞았다. 조카의 백일을 맞아 (와상 환자인 우리 엄마를 제외한) 가족들이 다 모인 식당에서도 오빠는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내가 오빠의 허리 수술을 만류하는 이유는 오빠가 아직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이기도 하고, 허리 수술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들은 탓도 있지만, 엄마 때문이기도 하다.
엄마는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허리 협착증 수술을 받았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기 전이었다. 엄마 친구가 비수술 치료를 한다는 병원을 소개해줬지만, 보험 적용이 안 되는 병원이라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 결국 집 근처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했고, 엄마는 엄청 힘들어했다. 마취가 잘 안 되었던 것 같다고, 수술할 때 너무 아팠다고, 애 낳을 때보다 백배는 더 아팠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를 가끔 생각한다. 그때 그 수술이 너무 아프고 힘들었어서, 정말로 마취가 잘 안 되었어서, 그게 병의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의심할만한 원인은 끝이 없다만….
“어렸을 때는 진짜 기억나는 게 없어.”
나는 소파 옆 식탁 의자에 앉아있다. 오빠는 반쯤 누운 채,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어렸을 때 기억을 떠올려보고 있자니 무슨 정신과 상담이라도 하는 분위기다.
“5학년 때 이전은 기억 안 나는 거지?”
“안 나지.”
오빠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우리 식구는 당시 엄마 아빠가 운영하던 금은시계안경방 뒷집에 살고 있었다.(7화: 엄마의 신혼집은 '셰어 하우스’였다.) 집에는 옥상이 있었는데,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한단 한단이 세 살짜리 아이 키 정도로 높았다. 오빠는 그 계단을 오르다 떨어졌고, 그 뒤로 5학년 이전 기억이 사라졌다.
“그럼 최초의 기억이 뭐야?”
“엄마가 나 세수시켜준 거. 나 떨어졌을 때.”
“병원 안 가고 세수를 시켰다고?”
“내 머리에 뭐 붙어있고. 세수시키던데.”
“그럼 병원 갔다 온 거겠네.”
“모르겠어. 그냥 엄마가 붙였을 수도 있지.”
“그럼 5학년이 아니라 3학년 이전이 기억 안 나는 거야?”
“아니. 5학년 이전까지 기억 안 나.”
“세수시킨 건 기억나고?”
“그 장면만 기억나. 떨어질 때 장면이랑, 엄마가 세수시킨 장면.”
“엄마도 거기서 떨어졌었는데.”
“그래?”
오빠는 몰랐나 보다. 혹은 5학년 이전의 일이라 잊었는지도. 내가 7살 혹은 8살 무렵이었다. 방 옆에는 시멘트 바닥으로 된 부엌이 있었다. 부엌이자 욕실로 쓰는 곳이었다. 바닥에 두고 쓰던 은색 세숫대야가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물을 담은 채 쭈그려 앉아 손을 씻고 있었다. 내 손이 너무 까맣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특히 손바닥에 비해 까만 손등이 싫었다. 비누로 깨끗이 씻으면 조금 하얘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비누로 손을 씻고 또 씻었다. 10분은 넘게 씻은 것 같다. 엄마는 부엌에 들어오려다가 내가 있는 걸 보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떨어졌다. 구급차가 와서 엄마를 싣고 갔다. 너무 무서웠다. 우리 엄마 어떡하지. 나 때문에 잘못되면 어떡하지. 오빠는 작은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잠든 오빠 옆에 누워서 엉엉 울었다.
“엄마 따라 계 수금하러 다닐 때. 엄마 손 잡고 따라다녔던 거 기억나.” 오빠가 말했다.
“오빠도 따라다녔어? 나는 나만 따라다닌 줄 알았는데.”
“나도 다녔어. 너랑 나랑 같이 따라다닌 적도 있었을걸.”
“어떤 사람이 곗돈 들고 막 튀고 그랬잖아.”
“맞아. 그랬다고 들었어.”
그 시절에는 계도 많았고 곗돈 가지고 튀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다. 야반도주도 있었다. 우리 가게에서 1분 거리에 약국이 하나 있었는데, 그 가족들이 동네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놓고 야반도주를 했던 게 기억난다. 요즘 같이 정보가 촘촘하면서도 다 오픈된 세상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리고 아파트 살 때 엄마가 아빠 가게로 도시락 나르던 거.” 오빠가 말했다.
“아. 그 빨간 바구니에.”
“어. 거기에 밥이랑 국이랑 반찬 다 넣고. 엄청 무거웠어 그거. 뚝배기를 그대로 담아가지고.”
그 바구니는 나도 몇 번 들어본 기억이 난다. 작은 캐리어 정도 크기의, 하얀 뚜껑이 달린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였다. 그걸 들고 낑낑거리며 아파트에서 가게까지 10여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걷다 보면 뚝배기에 담긴 국이 다 흘러넘쳤었다. 엄마는 뭘 그렇게 고생해서까지 밥을 날랐을까. 아빠는 잘 기억도 못하는데.
“그리고 가게 뒤에 살 때 같이 저녁 먹던 거. 아빠가 가게 문 닫고 나면 한 8시였는데. 우리 집이 저녁을 좀 늦게 먹었잖아. 한 아홉 시쯤?”오빠가 말했다.
“더 늦게 먹었어. 한 열 시에 먹었어. 난 다른 집도 다 저녁을 밤 열 시쯤 먹는 줄 알았다니까.”
“나도.”
“삼겹살 엄청 자주 먹지 않았어?”
“삼겹살은 보통 내가 삐졌을 때. 나 달래줄 용도로 삼겹살 많이 해줬던 것 같아.”
“왜 삐져?”
“뭐 뭐든 간에. 내가 삐졌거나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으면 꼭 엄마가 “고기 샀다, 삼겹살 먹자” 했는데. 그땐 몰랐는데. 크고 나니까 생각한 건데. 그게 엄마가 내 기분 풀어주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
삼겹살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먹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자주 삐졌었단 말이야?
“닭 키웠던 거 기억나?”
내가 물었다.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는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건이다. 내 기억으로는 약 일주일, 오빠의 기억으로는 그보다 더 꽤 오래 닭을 길렀다. 윤기 나는 부드러운 털을 한 커다란 수탉은 가게 뒷방 야외 복도에 앉아있었다. 나는 집에 있을 때면 늘 부엌 앞에 쪼그려 앉아 닭을 쓰다듬었다. 이름도 붙여줬던 것 같은 데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꼬꼬, 꼬순이 뭐 그런 거였으려나.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돌아갔는데 닭이 사라졌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귀결처럼, 그날 밥상에는 닭이 올라와 있었다. 어린 나는 혼란에 빠졌다. 이게 꼬꼬(혹은 꼬순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엄마 아빠도 별 말이 없었다. 결국에는 나도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엄마가 해준 닭죽 맛있었는데.”
오빠가 입맛을 다셨다. 맞아. 맛있었지. 쟁반에다가 닭을 다 찢어가지고 소금 찍어먹고. 살코기는 찢어다가 닭죽에 넣어서 먹고. 네 식구가 그걸 삼사일은 먹었는데.
“그리고 엄마가 도시락 싸주면. 나는 도시락 싸고 다녔었잖아. 너도 도시락 싸고 다녔냐?” 오빠가 물었다.
“어. 고1 때까지.”
“암튼 그 도시락 반찬을 되게…. 뭐라고 해야 되지. 되게 조금조금씩 싸주면서 되게 건강식으로만 싸줬던 것 같아. 나물. 감자볶음. 참치. 참치도 참치캔 하나를 다 주는 게 아니라 그걸 까 가지고 4분의 1? 그거 넣어주고. 감자 볶아서 넣어주고. 뭐. 소시지는 싸준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
“건강식이 아니라, 거의 김치만 만날 싸줬어.”
“어. 진짜 한 번도 소시지 같은 걸 싸준 적이…. 한 번 있나?”
“반찬 잘 싸 오는 애들은 인기 많잖아. 그래서 인기 없었지. 김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감자를 꼭 딱딱하게.”
“맞아. 설익어. 설익었었어.”
내가 맞장구를 친다. 계란말이도 기억난다. 자잘한 당근이 엄청 박혀있던. 싱겁다가 어느 한쪽만 무지하게 짰던. 갑자기 엄마 반찬 성토대회다. 마흔 넘은 아들 딸이 몸져누워있는 엄마 모르게, 엄마가 수십 년 전 싸준 도시락 반찬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엄마는 얼마나 지겨웠을까? 반찬이 맛이 있든 없든 그걸 매일 두 통씩 싸야 한다는 게, 그걸 또 매일 설거지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지겨운 일이었을까? 아, 거기에다가 아빠의 그 거대한 빨간 바구니 도시락까지.
“엄마한테 감자 좀 팍 익혀달라고 그랬더니, 엄마가 이게 맛있는 거라고 막 그랬는데. …. 그땐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웃긴 게 지금은 나도 설익은 거 좋아해. 너무 풀어진 거 말고.”
오빠가 말 끝에 웃음을 섞는다. 오빠와 나는 한동안 말이 없다. 나는 설익었던 감자채의 맛과 식감을 곱씹어보는 중이다.
“그리고 가게 뒤에 살 때. 김장할 때 만날 가게 문 닫아 놓고 가게에다가 신문지 펼쳐놓고 김장했었는데.”
오빠가 말했다.
“그랬어? 가게 뒤 복도에서 하지 않았나?”
“가게 안에서도 했어. 문 닫아놓고. 생선 썩힌 거 넣어서 김장하고 막 그랬어. 그땐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은 그런 김치가 그리워. 그런 맛이 나는 김치….”
오빠의 기억은 주로 먹는 것과 연관이 되어 있나 보다. 김치, 감자볶음, 닭죽…. 김치라면 나도 기억한다. 가게에서 놀고 있었는데, 가게 뒤에서 김치 속을 버무리고 있던 엄마가 나를 불렀다. 갔더니 엄마가 내게 간을 보라고 했다. 배추 속 가장 작은 이파리를 떼어서 속을 넣어서 내 입에 쏙 넣어줬다. 정말, 진짜, 너무 맛있었는데.
나의 최초의 미식 경험이 있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맛있는 음식. 나는 여섯 살 정도였는데, 그때도 나는 가게에서 놀고 있었고 가게 뒤 부엌에서 엄마가 나를 불렀다. 갔더니 엄마가 갓 부친 뜨거운 동그랑땡을 조금 잘라 내 입에 넣어주었다. 그 맛은 충격적이었다. 정말, 너무, 진짜로 맛있었다. 세상이 뒤집힐 만큼.
그 맛은 이제 다시는 맛볼 수 없다. 엄마가 요리를 할 수 없게 되어서이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게 변해버려서이기도 하다. 세월, 나이, 체질, 혀의 감각, 입맛.... 남아있는 건 그때 받은 충격의 기억, 엄마가 가게 뒷 문간에 서서 나에게 뒤집개에 동그랑땡을 올려서 건네주던 흐릿한 장면, 그리고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