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는 물어볼 수 없어서 7.] 아빠에게 물어보았다.
엄마와 아빠의 신혼집은 서울 용답동의 방 한 칸이었다. 한 집에 세 가족이 세 들어 사는 형태였다. 거기서 1년을 살고 성수동으로 이사했다. 성수동에서 새로 살게 된 집은 아파트였는데, 거기서도 다른 가족들과 집을 공유하며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셰어 하우스’ 정도 되려나. 나보다 2살 많은 오빠가 그 집에 살 때 태어났다.
안경 도매상을 하던 아빠는 결혼 후 금은방과 안경을 함께 하는 가게의 ‘안경부’를 맡게 되었다. 아빠의 말에 따르면 아빠는 장사를 잘했다. (내가 지켜봐 온 아빠는 장사를 잘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라 믿을 수 없지만 뭐, 젊었을 때는 달랐을 수도.) 장사가 잘 되자 가게를 세 내준 사장이 샘이 나서 가게를 다시 가져가버렸다. 아빠는 근처에 금은시계와 안경을 함께 하는 가게를 새로 냈다.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한 ‘미광당’의 탄생이었다.
아름다울 ‘미’, 빛날 ‘광’, 집 ‘당’. 나는 한자 중에서도 가게 여기저기 적혀있던 미광당의 한자를 가장 빨리 익혔다. 미광당 뒤에는 방이 딸려 있었다. 가게 계약금이 모자랐던 엄마는 성수동 아파트를 정리하고(정확히는 방 한 칸을 정리하고) 미광당 뒷방으로 이사 왔다. 그곳에서 내가 태어났다.
집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가게 뒤에 딸려있는 빨간색 철문을 열면 시멘트 바닥으로 된 좁다란 야외 복도가 나오고,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문은 창호지 문이었는데, 미닫이 문이었는지 여닫이 문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빠와 함께 침 묻힌 손가락으로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방 안을 들여다보며 낄낄대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나에게 손을 위로 뻗어보라고 해서,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높이에 손잡이를 달아준 기억도 난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방이고, 거기서 또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빠와 내가 자는 작은방이었다. 아니, 안방과 작은 방 사이에는 아예 문이 안 달려 있었던가? 아무튼 두 방이 얇은 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합쳐봤자 원룸 크기도 안 되는 작은 집이었던 것 같다.
방 옆으로 부엌이 있고, 조금 더 가면 계단 두 칸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 앞에는 2층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 계단 한 단의 높이가 세 살 아이 키 정도로 높았다. 오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그 옥상을 올라가다가 떨어졌고, 엄마도 내가 7살 때쯤, 빨래를 거두러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살림은 가게 뒷방에 차렸지만 엄마에게는 ‘자가’가 있었다. 엄마 아빠가 아직 시골에서 살 던 작년 초에 작은 아빠에게 들은 얘기인데, 엄마가 부동산을 잘했었다고.
“엄마 친구가 소개해줘 가지고 삼성동 아파트 사고. 청약은 상계동 됐었지. 성수동 아파트 전세로 살고 있을 때 상계동 아파트 당첨되고…. 가게 뒷방에 살 때는 삼성동 아파트 사서 세주고 그랬지.”
아빠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상계동 아파트나 삼성동 아파트에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헐값에 날려먹었다. 아빠가 엉뚱한 사람에게 보증을 서준 탓이었다. 그 엉뚱한 사람은 당연히(?) 튀었다. (어디서 많이 들은 너무 익숙한 스토리 아닌가?) 검찰인가 법원에서 소환장인지 내용증명인지가 우리 집으로 날아와 엄마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손을 벌벌 떨리게 했다. 전남 보성에 있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집을 정리하면 해결될 돈이었지만, 아빠는 고향집은 절대 안 된다며 엄마가 투자해 둔 아파트를 (엄마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로) 팔아버렸다.
“그때 당신이 그렇게만 안 했어도!”
엄마 아빠가 서로에게 자주 하던 말이다. 아빠는 엄마가 이모들이랑 계를 하다가 돈을 날려먹은 것과 자신의 국민연금을 해약해 버린 것을, 엄마는 아빠가 보증을 잘못 서서 아파트를 날려먹은 것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을 언급하며 자주 다퉜다.
“바보들의 행진이었어.” 파킨슨병 증상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17년쯤 전 엄마가 하던 말이다. 동의한다. 하지만 뭐, 엄마 아빠만 그랬겠는가. 우리는 다 바보의 행진을 한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혹은 적어서, 친구를 잘못 만나서, 게을러서, 오만해서, 철이 없어서.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오빠랑 나 태어났을 때 어땠어?”
내가 물었다. 아빠는 답이 없다. 갑자기 하얀 벽이 된 것처럼 눈앞의 텔레비전만 멍하니 바라본다. 내가 잘못했다. 아빠에게 감정을 물어보면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나랑 오빠랑 둘 다 김주필 산부인과에서 난거지?” 내가 다시 물었다.
“너는 김주필에서 낳고. 오빠는 딴 데서 낳았어.”
아빠가 남의 가게에서 ‘안경부’를 운영할 때, 그리고 성수아파트에서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 때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가게로 ‘보험 하는 여자들’이 들락날락거렸는데, 엄마와 아빠도 그 여자들을 통해 보험을 하나 들었다.
“그래서 그 아줌마가 소개해준 산부인과를 다녔는데. 거기도 동네긴 한데 좀 떨어진 데야. 엄마가 저기 (진통) 한다고 해서. 새벽에 엄마 데리고 끙끙거리면서. 병원까지 꽤 거리가 있는데 간신히 데리고 가 가지고.”
“걸어서?”
“어.”
세상에.
“가자마자 얼마 안 돼서 오빠 태어났지.”
“아들인지 미리 알았어?”
“아니 그때는 그런 거 몰랐어.”
“그래서 어땠어? 오빠가 태어났을 때?
“뭐 어떻긴 어때? 그냥 그랬지.”
…. 감정 관련 질문에 대한 아빠의 답은 언제나 무응답이거나, ‘그냥 그랬지’다.
엄마는 오빠를 낳고 거의 바로 둘째를 임신했다. 그리고 유산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엄마도 이따금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나 낳기 전에 언니가 있었다고. 그 언니가 나왔으면 나보다 더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들었을 거라고. 내가 말을 안 들어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그때 유산을 안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하는 말이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엄마도 참 웃기다. 그런 말을 나한테 왜 하는가? 나는 강철 심장이기에 상처 따위 안 받았지만.) 근데 정말 어땠을까. 나 대신 언니가 세상에 나왔다면. 그래서 내가 세상에 없었다면.
“잘못되고 얼마 안 돼서 바로 너 들어서가지고.”
“유산한 건 딸이었지? 엄마가 언니라고 그랬는데.”
“아들인지 딸인지는 몰라.”
“엄마들은 느낌으로 아는 거예요.”
주방에서 일을 하던 요양보호사 여사님이 끼어든다. 하긴. 그때는 성별을 알 수 없었던 때다.
“너는 그래서 아침 먹고. 점심때 가까이 돼서 낳았을 거야. 김주필 병원이 가게 바로 건너편에 있었으니까….”
“엄마한테 물어봤을 땐 7시에서 9시 사이라고 그랬는데?”
“그래? 아침이었나 보다 그럼. 그렇게 되면 그 전날 입원을 했던 모양이네?”
재미로 친구가 사주를 봐줄 때면 7시에서 9시 사이에 태어났다고 답했었는데. 혹시 점심 즈음인 건가? 그래서 늘 사주가 이렇게 안 맞나? 어쩐지 올해 사주가 엄청 좋다고 했는데 풀리는 게 하나도 없더니…. (심지어 실직하고 수개월 간 취직을 못하고 있다.)
하여간 그리하여 우리 가족이 완성되었다. 미광당 뒷방에 사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