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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파킨슨병이 찾아왔다.

[엄마에게는 물어볼 수 없어서 8.] 나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by 두지

“손이 이렇게 계속 떨려.”


16년 전. 피아노 의자 모서리에 앉아 말하던 엄마를, 나는 기억한다. 피아노는 안방 창가 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아파트에 몇 년 살 때 거실에 놓고 쓰던 걸, 작은 집으로 이사 올 때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온 것이었다. 방바닥에 앉아있던 내가 엄마를 올려다봤다. 내 쪽을 향해 내민 엄마의 손이 정말 떨리고 있었다. 아빠와 금은방을 할 때는 ‘표준 손가락’ 사이즈였던 예쁘고 긴 손. 식당을 하고 나서부터는 거칠게 갈라져버린 손. 그 손이 내 얼굴 앞에서 가늘고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엄마의 증상을 찾아봤다. ‘파킨슨병’ 일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엄마와 함께 한 대학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삼일 정도 입원을 하면서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당장 입원하자고 했지만 엄마는 싫다고 했다. 입원을 삼일씩이나 하면 돈이 얼마나 나오는 줄 아느냐며. 돈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 중에는 돈을 변변하게 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10년 넘게 운영했지만 빚만 잔뜩 불린 식당을 폐업한 참이었다. 식당 폐업 후 아빠는 아파트 경비원, 야간 목욕탕 청소부 등을 전전하며 일을 했고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일하면서 24시간 격일제 근무를 했다. 오빠는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다니며 취업 준비에 몰두해 있었고, 그나마 대학교 졸업 직후 작은 잡지사에 취직해 ‘수습’으로 근무하며 한 달에 180만 원을 버는 내가 돈을 가장 많이, 그리고 고정적으로 버는 사람이었다.


나는 다른 병원을 알아봤다. 파킨슨병으로 제일 유명하다는 교수를 찾았다. 진료실 앞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엄마 차례가 되었다. 진료실로 들어가자 교수가 엄마에게 일자로 걸어보라고 했다. 엄마가 씩씩하게 걸었다. 작은 진료실을 왕복으로 걸은 엄마에게 교수가 말했다.


“파킨슨병입니다.”


진료실을 나왔다. 엄마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자주 보아온, 익숙한 표정이었다. 가게에 손님이 없을 때, 가게 전기세 고지서를 들여다볼 때, 금은방을 정리하고 난 후 집에 둔 보석을 하루 만에 도둑맞았을 때, 집주인이 전세를 월세로 돌린다고 하는데 아빠가 이사를 안 가고 월세를 내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 봤던 그 표정.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자.”


말이 없는 엄마에게 내가 말했다. 엄마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병원 근처 고기 집으로 가서 냉면을 시켰다. 엄마와 내가 둘 다 좋아하는 메뉴였다. 나는 냉면을 먹으며 핸드폰으로 파킨슨병에 대해서 열심히 찾아봤다. 기대수명 10년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10년? 내 눈앞에 있는 우리 엄마가 10년 밖에 못 산다고? 그럴 리 없었다. 다시 찾았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약물 조절을 잘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면 진행을 늦출 수 있다고 나왔다. 파킨슨병으로 사망하지는 않고, 병이 진행되면서 폐렴이나 뇌졸중 등 합병증이 와서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엄마에게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약 잘 먹고, 걷기 운동을 열심히 하면 된다는 정보만 전했다. 그리고 잘 넘어가지 않는 냉면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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