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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된 엄마 (feat. 동대문 그 남자)

[엄마에게는 물어볼 수 없어서 6.] 아빠에게 물어보았다.

by 두지

“글쎄. 별로 해줄 얘기가 없는데. 요샌 다 깜박깜박해서. 다 잊어먹어 버렸어.”


아빠가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은 정수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티브이에서 남자 연예인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아빠는 2년 전부터 보청기를 끼기 시작했음에도, 티브이를 거의 최대 볼륨으로 해놓고 보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냥. 아무거나 생각나는 거 말해주면 돼.” 내가 리모컨으로 티브이를 꺼버리며 말했다.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그럼 내가 물어보는 거 말해줘. 엄마 어떻게 만났어? 선봤지?”

“그치.”

“누가 선 주선했어?”

“엄마가.”

“엄마?”

“그러니까. 너네 할머니가.”


아빠가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걸 처음 들은 터에 잠깐 헷갈렸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아빠가 할머니를 뭐라고 불렀더라? 친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렇게 어렸을 때도 아니었는데, 아빠가 할머니를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어머니? 하여간, ‘엄마’라고 부르는 건 본 적이 없다.


“엄마가 정월이면 신점도 보고 하던, 가깝게 지내는 무속인이 있었어. 그 사람이 엄마한테 얘기했지. 좋은 아가씨가 있다고.”


아빠는 당시 동대문에서 안경 도매 일을 하고 있었다. 서울 곳곳의 안경점을 돌아다니며 안경테와 렌즈를 파는 일이었다.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특용작물’ 농사를 해보겠다고 하다가 빚만 잔뜩 진 후였다 농사는 어떻게 하든 망하는 장사였다. 농사가 잘 안 되면 당연히 망하고 농사가 잘 되어도 가격이 폭락해서 망했다. 뒤늦게 서울 동대문에서 안경점을 하던 사촌에게로 가 일을 배웠다. 그러다 보니 장가가 늦어졌고, 서른이 넘어서야 선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아빠는 쉬는 날이 일주일에 딱 하루, 일요일이었다. 아빠는 쉬는 날을 선 보는 데 썼다. 선을 수십 번을 봤지만 늘 어긋났다. 아빠 쪽에서 마음에 들어 하면 상대방이 마음에 안 차하고, 상대방이 아빠를 마음에 들어 하면 아빠 쪽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1980년 봄의 어느 일요일, 동대문에 있는 한 다방에서 엄마를 만났다.


“다방에서 뭐 마셨어?” 내가 물었다. 난 늘 이상하게 그런 디테일이 궁금하다.

“뭘 마셔. 커피 시켜 먹었지.”

“엄마 처음 봤을 때 어땠어?”

“딱 보니까. 뭐. 그분이 얘기한 대로야. 성격도 좋고 어쩌고 저쩌고 한다고 했는데. 처음 봤을 땐 좀. 약간 마음에 와닿기도 했고."


아빠가 서른넷, 엄마가 서른한 살 때의 일이다. 당시, 그러니까 80년대 초반에는 결혼하기에 아주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꽝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마음에 들었지만 엄마 쪽에서 연락이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조건, 그러니까 국졸이고 돈도 없고 직장도 떠돌이 도매상이라는 걸 너무 다 까놓고 다 말해 버려서 그랬을 거라고, 아빠는 분석했다. 뭐 어쩌겠는가. 아빠도 엄마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다시 일요일마다 열심히 선을 보러 다녔다. 그런데 수개월이 지난겨울, 아빠가 일하는 가게로 전화가 걸려왔다.


“가게에. 세일즈 하고 돌아다니다가 일하던 가게에 가니까. (엄마가 살던) 한남동에서 전화가 왔대. 받았는데. 처음에는 누군지 기억도 안 나. 하도 오래돼서. 근데 얘기하다 보니까 기억이 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지금은 바쁘니까, 이따 저녁에 동대문으로, 나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나오라고 했어.”


아빠는 당시 오전 10시에서 11시쯤 가게에 나갔다. 서대문, 동대문, 성북구 등 구역을 정해두고 서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저녁 6시나 7시가 되면 일이 마무리되는 일정이었다. 그날도 그즈음 일이 끝났을 거라고, 아빠는 기억한다. 반년이 넘어 다시 만난 엄마와 아빠는 차를 마셨다. 그리고 저녁을 먹었다. 첫 데이트였다.


“뭐 먹었어?” 나는 늘, 이런 게 궁금하다.

“저녁? 글쎄. 뭐 먹었는지는 생각이 잘 안나네.”


다시 만난 자리에서도 아빠는 엄마에게 강조해서 말했다. ‘나는 가진 게 없다. 배움도 짧고 직장도 뚜렷하지 않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라.’ (이 정도면 거의 그만 만나자는 말 아닌가? 아니면 엄마의 도전 정신과 오기를 끌어내려는 고난도의 밀당?) 저녁을 먹은 둘은 서울 시내를 돌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만났다. 둘은 또 서울 시내를 걸어 다니며 이야기를 나눴다. 늦게까지 이야기하다 보니 통행금지 시간이 지났다. 이거 뭔가 얘기가… 영화 <비포 선라이즈>처럼 흘러간다.


“동대문에서 한남동이면. 택시 타면 금방이거든? 근데 아빠가 못 가게 했어. 통행금지 시간 됐다고. 호텔로 갔어.”

어머? 아빠의 급작스런 고백에 내가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그러니까. 결혼 전에 호텔을 갔다고? 두 번째 데이트에서? 80년대에? 아니 저기, 엄마. 내가 남자친구랑 있겠다고 집에 안 들어간다고 했을 때 그렇게 걱정을 하고 성을 내고 난리법석을 쳤으면서…. 설마, 오빠가 그때…? 아니다. 결혼식 날짜와 오빠의 생일을 따져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빠가 여러 번 말했음에도 엄마는 아빠 집이 ‘그 정도로’ 가난하다는 아빠의 말을 믿지 못했다. 아빠는 실상을 보여주겠다며 구정에 엄마를 시골집으로 데리고 갔다. 엄마가 파킨슨병을 앓고 5년 정도 지난 후 아빠가 엄마를 데리고 가서 10여 년을 산, 전남 보성의 그 집이었다.


“엄마는 설마 설마 했다가 진짜 그러니까. (진짜 그렇게 가난하니까) 좀 실망했나 봐. 한참 고민을 했나 보더라고.”


아빠는 엄마에게 (결혼을 할지 말지) 당신이 결정하라고 했다. 엄마는 고민이 깊었을 테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초조하기도 했을 거고. 결론은? 엄마는 결혼하기로 했고 오빠와 내가 세상에 나왔다.


“한남동(외갓집)에는 언제 처음 인사 갔어?”

“엄마랑 결혼하기로 하고 바로 갔지.”

“그땐 외할머니 안 아팠어?”

“안 아팠지.”

“아빠 맘에 들어하셨어?”

“엄마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했는지는 몰라도. 좋게 봐주시더라고. 엄마가 나한테 집에다가는 학교 얘기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시켰거든. 엄마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데. 내가 학벌도 그렇고 가진 것도 없잖아. 그래서 집에다가는 사실대로 말 못 하고 거짓말을 한 거야. 학벌도 어디 나왔다고 거짓말하고. 시골에 가진 것도 있다고 하고.”


아빠는 국졸이었지만 엄마는 고졸이었다. 그것도 공부를 꽤나 잘해서 당시 명문이었던 광주여고를 나왔다. 아빠네 집은 시골에서도 가난한 집이었지만 엄마네 집은 서울 한남동 양옥집에 살며 쌀가게를 하는, 나름 꽤 괜찮게 먹고사는 집이었다. 엄마는 걱정되었으리라. 자기는 나이도 차서 결혼이 급해 죽겠는데 집에서 학벌도, 재산도, 직업도, 집안도 다 안 되는 이 남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반대할까 봐. 엄마는 심지어 나까지도 속였다. 학교에서 하는 가정환경조사에 부모님 학벌을 쓰는 칸이 있었는데(지금도 의문이다. 그런 걸 왜 조사하는 거야?), 엄마한테 물어보니 둘 다 ‘고졸’이라고 쓰면 된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었다. 아빠가 국졸이라는 건 성인이 되고 나서야 어쩌다가 알았다. 아무튼 엄마는 아빠와 결혼했다. 고졸인 데다 시골집에 돈이 좀 있는 남자로 꾸며서. 두 번째 만남이 있었던 겨울 후 삼 개월이 지나, 봄이 다시 찾아온 1981년 3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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