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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원조 ‘츤데레’였다.

[엄마에게는 물어볼 수 없어서 4.] 다섯째, 여섯째 이모에게 물어보았다

by 두지


우리 엄마는 무뚝뚝하다. 사람이 ‘목석’ 같다고 할 때 그 ‘목석’의 원형이 바로 우리 엄마다. (엄마의 딸인 나 역시 못지않은 ‘목석’이다.) 표현을 잘 안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정이 많은 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가 많았다. 엄마의 정은 (한국말을 잘 못해서 엄마와 말이 통하지 않는) 우리 남편도 느꼈다. 처갓집에 가면 반가운 티를 내는 건 아빠였지만, 사위인 자신을 진심으로 반기고 좋아한다는 게 느껴지는 건 엄마였다고. 자신을 보면 엄마의 얼굴에 전구가 켜진 듯 반짝, 밝아지는 게 보인다고.


“이만한 감을 탁! 놓고 탁! 사라져.”


다섯째 이모는 서울 한남동에 살 때 고3이 됐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무뚝뚝한 사람이 독서실에 갑자기 나타나서 아무 말도 없이 책상에 커다란 감을 두고 가버렸고, 그 무뚝뚝한 사람은 바로 우리 엄마였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우리 엄마가 사 준 빨간색 니트와 까만 폴라 티셔츠를 이모는 아직도 기억한다. (반면 나에게는 옷을 거의 사준 적이 없다. 돈이 없어서.) 다섯째 이모부는 몸이 좀 안 좋았는데, 그런 사람이랑 결혼한다고 하니까 제일 속상해 한 사람도 우리 엄마였다. 네가 어디가 어때서 그런 사람 만나냐고 반대하고 난리가 났단다.


내가 결혼할 때는 반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엄마는 아팠고, 나는 결혼하고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미국으로 날아가서 혼인 신고를 하고 왔다. 아마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내 결혼도 반대했을지 모른다. (반대한다고 엄마 말을 들을 나도 아니지만.) 하지만 본인이 아프니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 아픈 자기 때문에 오빠가 장가를 못 갈 거라고 걱정하고 또 걱정하던 엄마다. 지금에 와서 후회되는 건 하나다. 결혼식을 하지 않은 거. 엄마를 위해서라도 작게나마 결혼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미루고 미루다 결국 하지 않았다. 미안해 엄마. 내가 변변치 않은 게으름뱅이라.


“어릴 때 너네 엄마 지겨운 거 하나 있거든?”


다섯째 이모가 말을 이었다. 집안에 제사 등 큰 행사는 모두 외할아버지 책임이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외할아버지는 다섯째 이모를 데리고 기차로 두 정거장 떨어져 있는 큰 집에 다녀왔다. 이모가 집에 돌아오면 우리 엄마는 이모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질문공세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래가지고? 이모가 잠에 들어도 소용없었다. 이모를 흔들어 깨우고는 계속 물었다. 그래서? 이모가 너무 힘들어서 울어도 소용없었다. 우는 이모를 붙잡고 엄마는 물었다. 그래서? 그래가지고?


엄마는 나에게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같은 건 묻지 않았다. 시집을 간 후 엄마가 변한 걸까? 아니면 동생들을 대하는 것과 딸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걸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에 시도를 해 봤다가 내가 별 반응이 없자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나는 말이 없는 아이였다. 학교에 다녀오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엄마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는 사실은 다 커서 알았다. 엄마가 조금 더 나중에 아팠다면 서로의 얘기를 조금이라도 나눌 기회가 있었을까? 다 소용없는 생각이지만.


2015112110245729206.JPG 1975년 제3한강교 모습 (출처: 서울기록원, https://archives.seoul.go.kr/item/0000000000007715)


한남동에 살 때는 식구도 많은 데다 쌀가게에서 일하는 남자 세 명의 살림까지 거두느라 일이 많았다. 게다가 외할머니가 뭐든지 다 손으로 직접 해야 하는 성격이라 빨래도 다 손빨래로 하고 김장도 백 포기 이상을 담갔다. 일은 주로 외할머니와 큰 이모, 둘째인 우리 엄마가 도맡아 했다. 셋째 이모도 일할 나이였지만 자꾸 꾀를 부리고 일을 안 하는 터에 다툼이 잦았다.


“큰언니가 결혼을 일찍 했어야 해.”


다섯째 이모가 말했다. 큰 이모가 20대이던 70년대만 해도 상대 집안이 양반집이냐 아니냐를 따지던 때였다. 이런 거 저런 거 따지다 보니 큰 이모의 결혼이 늦어졌다. 그때만 해도 서열대로 결혼을 안 하면 결혼을 먼저 하지 않은 윗사람이 무슨 하자가 있나 싶어서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는 시대였다. 취직도 쉽지 않았다. (대체 취직이 쉬운 시대가 한 번이라도 존재하기는 했던가?) 직장을 구하지 못하니까 맨날 집에 있지, 집안일은 힘들지, 시집은 못 가지….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맨날 싸웠고, 어느 날은 싸움을 보다 못한 외할머니가 울고 불며 제3한강교로 뛰쳐나갔기까지 했다고.


“둘째인 너네 엄마한테도 선이 들어올 거 아냐. 그러면 큰언니는 자기보다 먼저 시집가면 머리 깎고 중이 될 거라고 막 난리였어.”


막내 이모가 말했다. 엄마와 아빠는 엄마가 서른 하나가 됐을 때 결혼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늦은 나이였다. 나는 엄마가 그냥 적당한 남자를 못 찾아서 결혼을 늦게 했겠거니 생각했는데, 이유는 따로 있었던 거다. 엄마에게서는 이런 얘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큰 이모를 욕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엄마는 큰 이모를 좋아했다. 아마도 동생들과 집안일을 건사하며 함께 고생하고 지낸 동지애 같은 게 있겠지. 그리고 엄마는 알고 보면 정 많은 츤데레니까.





엄마는 다섯째 이모와는 일곱 살, 막내 이모와는 열두 살 차이가 난다. 막내 이모는 지금은 한복 가게를 운영하지만 예전에는 오랫동안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오빠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다섯 정거장 거리인 이모네 피아노 학원으로 매일 가곤 했는데, 그게 너무 싫고 지겨워서 엄마에게 제발 그만두게 해달라고 빌고 애원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내가 승리했고, 그래서 지금은 피아노를 못 친다.)


“피아노도 둘째 언니(우리 엄마)가 하라고 해서 시작한 거야.”


막내 이모가 말했다. 언니들이 그렇게 깨어있었다고, 동생들에게 이것저것 배우라고 권유하고 길을 터줬다고, 다섯째 이모가 덧붙였다. 오빠와 나에게는 안 그랬다. 중학교 때 친구가 같이 학원을 다니자고 해서 학원을 다니게 해 달라고 졸랐는데, 엄마는 돈이 없다며 안된다고 했다. (자진에서 학원을 다니겠다는 애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게 나였다.) 돈은 ‘깨어있는’ 엄마를 변하게 했다. 동생들에게 이것저것 배우기를 권하던 엄마는 나에게는 학원도 못 가게 했다. 아니, 보내지 못했다. 돈이 없어서.


원망하느냐고? 별로. 나는 지금의 나와 내 삶이 좋다. 돈도 없고, 직장도 없고(현재 백수다. 언제까지 백수일지도 알 수 없다. 얼마 전까지 브런치에 ‘실직 일기’를 연재했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미래는 너무나도 막연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느냐면 또 그건 아니다. (,라고 오늘은 쓰지만 어제만 해도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지랄 발광을 하며 남편을 괴롭혔다.) 그리고 내가 지금의 내가 된 건 엄마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게 엄청난 포션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물심양면 퍼주지 않은 엄마 덕에 독립적인 인간이 될 수 있었다고, 가끔 나는 생각한다. 학원 따위 의존하지 않고, 엄마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잡초처럼 멋대로 크게 해 준 점은 엄마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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