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는 물어볼 수 없어서 3.] 다섯째, 여섯째 이모에게 물어보았다
영산포는 유복한 동네였다. 나주평야가 있어 쌀도 많이 나고, 포구여서 물자도 활발하게 돌았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일본 장사꾼들이 영산포로 많이 들어왔다. 우리 엄마와 이모들이 어렸을 땐 일본 사람들은 물러가고 없었지만, 동네에는 별채까지 딸린 번쩍번쩍한 일본식 한옥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동네 집들이 진짜 좋았어. 우리 집은 그냥 평범했는데. 다리 건너 선생님 댁에 놀러 갔더니 티브이로 미국 만화영화 틀어주고 그랬던 게 지금도 생각 나.”
막내 이모가 말했다. 외할아버지는 영산포에서 서울로 쌀을 수출하는 일을 했는데, 장사가 잘 돼서 당시 일가친척 중에서 제일 잘 살았다. 식구들이 사는 집도 일본 한옥이었다. 부엌 하나에 방 세 개짜리 집이었는데, 방 하나는 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 추워서 쓸 수가 없었다. 남은 두 방에서 열 식구가 북적이며 살았다. 그 시절에는 ‘잘 사는’ 집도 그렇게 살았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진짜로 멋있었어. 아버지 따라서 기차역 화물칸 자주 갔거든. 그럼 가마니로 쌀을 잔뜩 세워둔 게 보여. 아버지가 긴 도구로 가마니를 푹 찔러서 쌀 상태를 딱 봐. 양복 멋있게 착 차려입고.”
다섯째 이모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피어올랐다. 아들을 바란 원죄가 있긴 하지만, (*02화 참고) 외할아버지는 딸들을 귀하게 여겼다고, 이모는 말했다. 외할아버지는 딸들을 가르쳐서 뭐 하냐고 집안사람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 여섯 명의 딸들을 모두 고등 교육 이상까지 시켰다.
문득 궁금해진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외할머니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살았을지. 엄마에게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무뚝뚝한 엄마에 무뚝뚝한 딸이라, 엄마가 아프기 전까진 옛날 얘기 같은 건 물어보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었다. 엄마는? 엄마도 외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웠어? 둘째였던 엄마는 첫째인 큰 이모와 함께 집안일을 돕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던데, 그런 엄마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어? 엄마도 외할아버지 따라서 기차역 화물칸에 가본 적 있어? 엄마도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귀하게 여긴다고 느꼈었어? 눈을 감고 누워있는 엄마를 보며 마음속으로 물어본다. 단발머리에 눈이 가로로 긴, 언젠가 엄마의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서 본 흑백 사진 속 소녀가 나를 보고 씩 웃는다.
“9년 전에 우리가 너네 엄마 아빠 사는 보성 갔었잖아. 외삼촌이랑 나랑 다섯째 이모랑 이렇게 셋이. 그때 삼촌이 운전해 가지고 영산포 그 동네 지나갔거든? 그때는 우리 살던 그 집이 그대로 있었어.”
막내 이모가 말했다. 9년 전에만 해도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영산포의 인구는 지난 30년 동안 45%가 줄어 이제는 거의 인구 절멸 상황에 닥쳐 있다. 한때 외할아버지가 쌀을 서울로 보내며 돈을 벌었던, 번성했던 영산포역은 기차도 오가지 않는 폐역이 되었다. 그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기차 대신 레일바이크를 탄다.
1969년, 영산포에 흉년이 들었다. 할 일이 없어진 외할아버지는 한동안 만날 화투만 치러 다니다가 서울로의 이사를 단행했다. 한남동에 살림을 차리고 집 근처에 쌀가게를 열었다. 외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초사흘이면 시루떡을 만들어 장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옆집에 사는 무당에게 부탁해 굿도 했다. 외할머니는 그 굿을 하고 나면 그다음 날 장사가 잘되는 것 같다고 이모들에게 말하곤 했다.
한 번은 동네 배수 펌프장이 고장 나 홍수가 크게 났다. 뉴스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될 정도로 큰 홍수였다. 다른 동네 사람들이 ‘홍수 구경’을 하러 관광을 오기도 했다. (배를 타고 온 행상들이 먹을 것도 팔았다고.) 홍수로 집을 잃은 식구들은 바로 옆집인 콘크리트 건물 2층 집에 얹혀살았다. 열 식구가 남의 집에 며칠 동안 살아도 괜찮은 시절이었다. 2층 집 옥상에 올라앉아있으면 홍수가 나 잠긴 마을 위로 나룻배가 삐그덕거리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다섯째 이모는 옆집 여자애, 그리고 키우던 개 '오요'와 함께 옥상에 앉아 지나가는 나룻배를 보며 ‘창공에 빛난 별’이라는 노래를 부르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식구들이 살던 집은 물에 잠겨 다 망가져버렸다. 외할아버지는 집을 다 부숴버리고 단층 양옥을 지었다. 홍수로 집까지 잃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힘들었지만, 이모들과 삼촌들은 새 집이 생긴 게 마냥 좋기만 했다.
당시 우리 엄마는 취직도 못하고, 아직 시집을 안 간 큰언니의 차례를 기다리느라 시집도 못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쌀가게에 나가 장사를 도왔다. 인부들 밥을 나르고 가게를 봤다. 가게를 보다 심심하면 올벼쌀을 주워 먹었다. 그런데 그 생쌀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몸에 균이 생겼다.
“여기 배 옆에 혹이 이렇게 나서 수술했잖아. 너 알아?”
막내 이모가 물었다. 결혼 전에 어딘가 수술했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었지만 어디가 왜 아팠는지는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다. 학창 시절부터 엄마를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는데, 엄마가 수술을 했다고 하니까 그 남자애가 겁이 나서 다른 여자랑 결혼해 버렸다는 얘기는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엄마가 올배쌀만 안 주워 먹었어도, 그래서 균만 안 생겼어도, 그 남자가 조금만 덜 치사했어도, 그 남자랑 결혼을 했을까? 그럼 아빠랑 결혼할 일도 없었고 죽자고 고생할 일도, 그래서 이렇게 아플 일이 없었을까? 쓸데없고 끝도 없는 ‘if’가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둘째 언니(우리 엄마)는 한남동에서 먹을 거를 여기저기 숨겨놨어.”
막내 이모가 말했다.
“맞아. 그래서 동생들이 원성이 얼마나 잦았는지 몰라.”
다섯째 이모가 웃으며 덧붙였다. 엄마는 사과, 과자, 김 같은 것들을 집 구석구석에 숨겨뒀다. 하지만 야무지거나 영악하지는 못해 어디다가 뭘 숨겨뒀는지를 늘 까먹었다. 그래서 이따금 집 어딘가에서 썩은 김 같은 게 튀어나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동생들은 엄마에게 따졌고, 엄마는 히히히! 하고 웃고 넘겨버렸다. 어느 날은 밤에 과자를 몰래 먹으려고 촛불을 켰다가 불이 팔각성냥 통 안에 튀어버렸다. 놀래서 불을 끄다가 엄마의 눈썹이랑 앞머리가 홀랑 타버렸다.
“그리고 자고 있으면 막 깨워. 막내야! 막내야! 하고 밤중에 막 깨워. 그래서 일어나면 뭘 먹으래 나보고. 꼭 그랬어 밤중에. 밤중에 뭘 꼭 만들어가지고.”
막내 이모가 말했다. 너무 엄마답다. 우리 엄마는 먹는 걸 좋아한다.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 리스트 100개를 당장에라도 읊을 수 있다. 이모가 말한 전병 과자 과자도 좋아하고 옥수수도 좋아한다. 포도(특히 캠벨 포도)도 좋아하고 수박도 좋아한다. 곶감도, 미숫가루도, 깨가 들어간 과자도 좋아한다. 그렇게 먹을 걸 좋아하는 엄마가 작년에 뇌경색이 온 이후로 먹지 못하게 됐다. 부드러운 과일 같은 건 아주 가끔 먹지만 밥을 먹기는 어려워 콧줄을 통해 경관식을 넣는다. 콧줄을 빼는 시도도 해 봤지만 약과 물을 잘 안 먹으려고 해서 탈수 위험 때문에 다시 끼는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제일 안타깝고 가슴 아파하는 게 그거다. 그렇게 먹을 걸 좋아하는 사람이 먹지 못하게 되었다고.
밤중에 뭘 먹는 습관은 아프고 나서도 이어졌다. 아니, 더 심해졌다. 아빠가 챙겨주는 밥은 잘 안 먹고 꼭 밤중에 일어나 군것질을 하려고 해서 아빠의 진을 빼곤 했다. 내가 시골에 찾아가 며칠을 보낼 때도 그랬다. 파킨슨 약은 약발이 들고 안 드는 시간이 따로 있는지 하루에도 컨디션이 들쭉날쭉 하는데, 우리 엄마에게 약발이 가장 잘 받는 시간은 밤 시간이었다. 종일 힘없이 헤롱헤롱 하다가 밤 열 시쯤만 되면 말똥말똥해져서는 사과고 떡이고 뭔가를 먹자고 하곤 했다. 맛있게 먹는 엄마를 보며 그래, 이 정도면 괜찮지 뭐,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간은 지나가버렸다. 엄마가 몸은 아프지만 먹는거 하나는 잘 했던 시절도, 한남동 집 여기저기에 군것질거리를 숨겨두고 행복해하던 시절도, 외할아버지가 영산포에서 서울로 쌀을 수출하던 '잘 나가던' 시절도...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바로 지금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걸. 엄마 아주 가끔 입으로 먹고, 가끔 눈을 뜨고, 가끔 짧은 대답이나마 해주는 지금을.
* 사진은 한국저작권위원회의 공유저작물 <1920년대 전남 영산포 영산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