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는 물어볼 수 없어서 5.] 다섯째, 여섯째 이모에게 물어보았다
한남동에 사는 동안 우리 엄마를 포함한 8남매가 하나 둘 결혼을 했고, 그들의 자식들도 태어났다. 첫 번째 사촌은 넷째 이모 아들.(넷째 이모는 첫째 이모의 결혼을 기다리다 못해 이모부와 먼저 같이 살았다. 결혼식만 나중에 하고.) 두 번째는 넷째 이모의 딸. 그 뒤로 첫째 이모의 아들과 딸, 그다음이 우리 오빠, 다섯째 이모 딸, 나…. 이렇게 거의 연년생으로 줄줄이.
단층 양옥집에서 살던 식구들은 한남역 근처의 2층 양옥으로 이사를 갔다. 그게 식구들의 마지막 이사였고, 그곳이 내가 기억하는 외갓집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무가 많은 마당이 있고, 나무 마루가 깔린 거실과 세 개의 방이 있었다. 한쪽에 부엌이 있고, 나는 다락방으로 기억하지만 이모들은 2층 방으로 기억하는 공간도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그 집에 살 때,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내가 외할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많지 않다. 그중 하나. 네다섯 살 정도였던 나는 다락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 아래 앉아있었다. 키가 큰 외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다가와 말없이 씩 웃었다. 어색했다. 나를 귀여워해주고 싶은데 어찌할 바를 모르시는 것 같다는 게 느껴졌다. 말없이 나만 바라보고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내 발을 간지럽혔다. 별로 유쾌하진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노력이 가상해 뭐라도 반응을 해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수줍게나마 웃었다. 할아버지도 웃었다.
또 하나. 할아버지의 생신날이었던 것 같다. 일가친척이 우르르 다 같이 한남역 근처의 갈빗집에 갔다. 갈비를 먹은 건 기억 안 나고 후식으로 먹은 냉면만 기억한다. 냉면을 먹겠느냐고 누군가 물어서 옆에 앉아있던 지현(가명, 다섯째 이모 딸) 언니와 나눠먹기로 했다. 내 생에 첫 냉면이었다. 물냉면이었고, 맛은 기가 막혔다. 그때부터 냉면과 사랑에 빠졌다.
또 다른 기억 하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어려서 그랬는지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엄마에게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느냐고 물었다. “그래." 엄마가 답했다. “할아버지 몸이 누워서 하늘로 천천히 붕 하고 올라갔어?” 내가 또 물었다. “그래.” 엄마가 다시 조용히 답했다. 엄마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나는 질문을 그만뒀다. 대신 안방 바닥에 누워 엄마의 등을 보며, 엄마와 이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외할아버지의 몸을 생각했다. 그때 상상한 이미지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외할머니는 소처럼 일했다. 나름 밥 안 굶고 딸들 고등학교까지 보내는 살만한 집안이었지만 그 시절에 여자로 태어나면 살만한 집안이고 뭐고 다 소용없었다. 애초에 식구도 많고 쌀가게에 일하는 인부들도 챙겨야 해서 밥이고 빨래고 할 일이 많았는데 외할머니는 그 모든 걸 손으로 했다. 세탁기가 있어도 손빨래를 하고 명절이 되면 절구로 쌀을 빻아 인절미고 쑥떡이고 온갖 떡을 다 했다. (그래서 우리 엄마가 떡을 좋아하나 보다.) 과일로 온갖 술을 담가 지하실에 저장해 둬서 우리 아빠를 포함한 사위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특히 너네 아빠랑 첫째 형부, 그리고 넷째 형부 이렇게 셋이 사이가 좋았어. 외할머니를 잘 따르고 굉장히 좋아했어.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기술이 없었거든? 집에 뭘 고치고 그런 걸 전혀 못해. 문이 고장 나면 그냥 고무줄 달아놓고 살고 그랬어. 근데 이제 사위들 있으니까 뭐 고장 나면 하면 사위들을 싹 불러. 그럼 득달같이 달려와 특히 그 세 사위가. 세 명이서 진짜 효도했어. 할머니 아프시고 나서 자진해서 병원비 내고. 외할아버지가 부르면 밤중에라도 바로 막 달려오고….”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쓰러졌다. 뇌종양이었다. 수술을 했지만 크게 회복하지 못했다. 그때의 마비로 주저앉은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모습이다. 다리 하나를 쭉 뻗고, 나머지 하나는 접은 채 손으로 엉덩이를 끌며 방바닥을 기어 다니던 할머니. 이따금 손으로 자기 머리를 마구 때리며 막내 이모의 이름을 부르짖던 할머니.
“빨래를 하다가 맨날 여기 목 뒤가 찌르르, 찌르르하다고 했어.”
다섯째 이모가 말했다. 할머니가 일을 너무 많이 한 게 문제였다고 이모는 생각한다. 할머니는 맨날 마당에 나와 다리 한쪽만 펴고 빨래를 했다. 그리고 그 자세로 굳어버렸다.
하루는 보다 못한 다섯째 이모가 자기가 빨래를 하겠다고 나섰다. 빨래는 끝이 없었다. 빨랫감이 줄기는커녕 외할아버지가 빨래를 조금씩 조금씩 더 가져다 놓는 바람에 오히려 더 늘어나기만 했다. 신경질이 난 이모가 결국 안 하겠다고 하고 자리를 떴다.
“이제 후회하지. 그때 좀 더 할걸. 우리 엄마 세탁기 사드릴걸, 하고…. 내가 요새 여기 발가락이 갈라졌는데. 연고 사서 바르니까 금방 낫는 거야. 근데 우리 엄마도 발이 막 심하게 갈라지고 그랬었는데. 우리 엄마도 연고 사다 줄 걸. 내가 발라줄걸. 내가 어제도 그 생각을 했네.”
나이가 들 수록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난다고, 다섯째 이모는 말했다. 큰일이다. 나이가 더 들어서 엄마 생각을 하고 있을 나를 떠올리니 벌써부터 겁이 난다. 지금 뭘 어떻게 해야 나중에 후회를 덜 할까. 얼굴 자주 보기? 자주 주물러주기? 말 붙이기? 어떻게 해도 후회와 그리움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때 엄마 나이가 예순이었어. 너네 엄마랑 비슷하다니까? (우리 엄마도 예순 즈음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그때 엄마가 쓰러졌다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하늘이 무너지는 게 딱 그거구나 싶었어. 그때 내가…. 스물아홉인가 서른이었지.”
우리 엄마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스물여섯이었다. 파킨슨병은 병이 천천히 진행되는 터에, 나의 하늘은 그때 단번에 무너지지는 않았다. 나의 하늘은 조금씩, 천천히, 작아져갔다. 이모는 요즘 맨날 기도한다고 했다. 둘째 언니(우리 엄마)가 아프다고. 너무 오랫동안 아프다고. 이제 자유롭게 좀 놔주라고. 그런데 하늘로 가면 너무 섭섭할 것 같다고. 그러니까 병을 고쳐달라고.
외할머니가 아프자 외할아버지는 속이 상해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먼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5년 정도를 더 사셨다. 한남동 집이 처분되고 갈 곳이 없어진 외할머니는 자식들 집에 돌아가면서 살았다. 우리 집에서도 1년인가 2년을 살았는데, 내가 초등학교 4학년에서 5학년 정도 되었던 때로 기억한다. 엄마와 아빠는 가게에 매여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다녀와서 외할머니를 돌보는 일은 내 몫이었다. (오빠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친구들이랑 놀다가도 시간이 되면 할머니 밥을 챙겨주고 대소변을 받아주러 집으로 가야 했다.
할머니는 목청이 좋았다.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막내 이모의 이름을 목청껏, 정말 목청껏 부르곤 했다. 아파트 4층에 살던 때였는데,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도로변을 걷고 있으면 저 위에서 이모의 이름을 부르짖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온 동네에 쩌렁쩌렁 울려 퍼질 정도였다. 그때는 할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게 귀찮기도 하고 싫기도 해서 엄마에게 투정도 많이 부리고, 할머니에게 구박 아닌 구박도 했었다. 더 잘해드릴걸. 후회한다.
엄마가 시골에 살 때 다섯째 이모에게 전화를 자주 했다고, 다섯째 이모가 말했다. 밤에 걸어 다니고 있는데 귀신이 보인다고 하기도 하고(엄마는 파킨슨약 부작용 등으로 망상이나 섬망 증세를 겪었다.), 아빠가 신경질을 부린다고 이모 집에 가서 살면 안 되느냐고 묻기도 했단다.
10여 년 전, 나는 아빠가 엄마를 데리고 시골에 내려가는 게 못마땅했다. 엄마가 너무 외로울 것 같았고, 그게 엄마의 병에 더 악영향을 줄 것 같았다. 아빠는 아니어도 엄마는 사람들이랑 있는 걸 좋아하는데. 수년을 가족처럼 지내온 이웃들이랑 함께 얘기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지내는 게 엄마에게 훨씬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당시의 나는 아빠의 결정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나는 지금의 남편과 반 동거를 하고 있었고, 오빠는 엄마 아빠와 살고 있었는데 오빠의 스트레스가 심했다. 오빠와 따로 떨어져 살 집을 구할 돈은 없었다. 결국 엄마는 시골에 가서 살자는 아빠의 집요한 제안을 승낙했다.
시골에 내려가고 초반에는 괜찮아 보였다. 들깨를 심어다가 들깨 강정도 만들어 먹고, 수박을 심어다가 따서 먹기도 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는 엄마를 힘들게 했다. 매일 술을 먹고 술주정을 했다. (엄마를 혼자 감당하는 게 힘들어서 술을 더 마셨을 거다.) 엄마는 이모 말고 나에게도 자주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하며 아빠에게 전화해 화를 냈다.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걸 알면서도,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무력했다. 너무 무력해서 내 화와 슬픔을 표출하기에만 바빴다. 어리고 어리석었다.
엄마 아빠를 서울로 다시 올려 보내야 할 것 같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올라오면? 올라오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를 돌볼 건가? 내가 엄마 아빠와 함께 살면서 아빠를 자유롭게 놔줄 건가? 아니잖아. 아빠 탓을 하는 나 자신도 싫었다. 내가 아빠 탓을 할 수 있나? 엄마의 간병을 홀로 뒤집어쓰고 있는데? 오빠랑 나 자유롭게 살라고 그 고생, 지긋지긋함, 속박, 우울, 고립을 혼자 다 감당하고 있는데?
*그때의 나에게 알려주고 싶은 정보들이 많다. 노인이나 환자 돌봄 등을 위해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제도가 꽤 많이 있는데 그때는 그런 것들을 하나도 모르고, 알아볼 생각조차 못하고, 당시에는 주위에 아픈 가족이 있는 친구들도 없어서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요새는 인터넷으로 그런 정보들을 다 잘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정보들을 모은 글도 추후 공유하고자 한다.
“후회되는 게 있어. 한 번은 너네 엄마가 또 전화했는데. 내가 너무 힘들 때였어. 그래서 전화를 안 받았어. 그게 지금도 후회가 돼. 지금은 너네 엄마가 전화도 못하는데...."
다섯째 이모가 말했다. 후회는 우리 엄마도 했다. 아프고 나서 느닷없이 부모님께 자식 노릇도 제대로 못했다며 운 적이 있었다. 나? 나의 후회는 한도 끝도 없다. 후회할 걸 알면서 어리석은 짓을 해버렸고, 눈앞의 문제를 회피해 버렸다. 아빠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아무 일 없는 척 태연하게 살아버렸다.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다르게 살았을까? 엄마를 오롯이 감당한 아빠 덕에 누릴 수 있었던 자유를 제한하고, 다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더 노력했을까? 모르겠다. 인간은 그냥 후회하는 족속인 것일까? 아니면 나를 포함한 우리 외갓집 쪽이 유독 심한 것일까. 후회라는 건 가족을 생각하면 유독 두드러지는 감정인 것일까? '가족'이라는 말 뒤에는 그냥, 후회가 그림자처럼 어련히 따라붙기 마련인 것일까?
“9년 전에 광주에 너네 엄마 입원했을 때 나랑 막내이모랑 갔었잖아. 근데 너는 그때 왜 그렇게 우리 눈치를 봤어?”
다섯째 이모가 물었다. 눈치? 나는 가만히 앉아 그때의 일을 떠올려봤다. 당시 나는 배낭여행을 다니느라 라오스에 있었다. (참 철없이 들리지만, 그땐 그게 그렇게 중요했다.)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실려갔다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장 비행기표를 끊어 한국으로 돌아와 인천에서 광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탔다. 얼굴은 새카맣게 타고 커다란 배낭을 든 채로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이모들과 큰 외삼촌을 만났다. 이모들의 눈치를 봤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엄마가 이대로 가버리면 어떡하지. 이모들 앞에서 울어버리면 안 되는데. 혼자 집에 있을 때 울자. 참자. 그런 생각을 했던 건 기억난다.
“이상하게 눈치를 보더라고. 가슴이 아파 지금도. 이모는 엄마나 마찬가진데. 네가 좀 뭐가 창피했는지 눈치를 봤어. 엄마가 아픈데 자기는 해외여행 갔다 왔다고 뭐 그런 것 때문에 미안했는지 어쨌는지. 그때 용돈이라도 줄걸. 밥이라도 먹일걸. 후회되더라니까.”
이모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엄마는 아픈데 지 좋자고 여행이나 다니는 딸이라니. 그 죄책감에 이모들 눈치를 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엄마가 나아지고(거동까지 가능해졌었다) 4년 후, 나는 여행을 또 갔다. 나라는 인간은 후회해도 똑같은 짓을 또 하는 인간이다.
아주 오래전에 ‘식스 핏 언더’라는 미드를 본 적이 있다. 장례 사업을 하는 가족들의 일화를 담은 드라마였다. 다른 내용은 크게 기억 안 나는데 마지막 부분에, 딸이 아픈 엄마를 떠나 다른 도시로 가는 장면은 기억한다. 떠남을 망설이는 딸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픈 엄마를 돌보느라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그래서 후회했다. 너도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딸아, 가라. 너의 인생을 살아라.” 딸은 울면서 대도시로 향한다. 딸은 나중에 후회할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 곁에 남았더라도 후회했을지 모른다.
엄마 곁에 남지 않은 나는 후회한다. 엄마를 외딴 시골로 보냈던,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서울로 올려 보내지 못했던 과거의 무능력을 아쉬워한다. 하지만 달리 했더라면 후회가 없었을까? 인생이란 건 그냥 후회의 무덤 같은 게 아닐까. 그저, 조금이라도 덜 후회해 보기 위해 발버둥을 쳐볼 수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