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맘의 페미니즘

by 이틀

아들을 선호하는 집안배경 때문에 어릴때부터 남녀차별을 많이 겪으며 자랐다. 덕분에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남녀차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지니게 되었다. 남녀 차별성 발언을 듣게 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때마다 분개했다. 남자보다 더 강해지려고, 능력을 더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그 중에는 억지 노력도 있었다. 예를 들면 남자직원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사무실의 정수기 물을 혼자 갈아치우려고 노력한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여성성을 내세워 힘든 일은 되도록 피하는 동료들을 싫어했다. 다 똑같다고, 할 수 있다고. 젊은 날의 나는 그런 여자였다.


이런 나의 성향은 사회생활을 종종 힘들게 만들었다. 부장님이 공용냉장고를 정리하라고 할 때, 내가 여자라서 나를 시키는 거냐며 대들다가 혼났다. 그런 융통성도 없느냐면서. 그러나 끝까지 그건 나의 일이 아니라고 우겼고, 옆에서 보던 남자직원들이 그날 냉장고를 청소했다.


어느 과장님은 아내가 전업주부인데,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는다면서, 여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서 험담을 하곤 했다. 나는 듣다가 그 과장님께 "과장님도 남자의 역할을 하시지 않으면 되잖아요. 출근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또 언젠가 뉴스에서 남편의 폭력으로 얼굴에 멍이든 연예인이 남편을 고발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걸 보면서 부장님이 "맞을 짓을 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나는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그럼 부장님도 맞을짓을 하면 아내분께 좀 맞아야겠네요"라고 말해서 부장님의 밥맛을 뚝 떨어뜨렸다. 나의 이런 말과 행동을 보고 여자 선배는 "이대리 덕분에 속은 시원한데, 그래도 조심해. 계속 회사 다니고 싶으면 적은 만들지 않는게 좋아."라고 충고했다.


아이를 키우며 남성성과 여성성은 육아로 결정지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여자처럼 키우니까, 남자처럼 키우니까 그렇게 정해지는 것 아닐까 하는. 여자 아이에게 인형을 선물해주고, 핑크빛 드레스를 입히는 것도 우리가 가지는 선입견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아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칼싸움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 생각은 어느 정도는 맞았고, 어느 정도는 틀렸다. 아이마다 각자의 특색과 성격이 있지만, 아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동차를 좋아했고, 기차를 좋아했다. 가끔 어린이집 친구들과 노는 것을 보면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이 노는 것이 확연히 차이가 났다. 남자아이들이 좀 더 격하게 놀았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도 남녀의 차이는 확연했다. 여자 아이들이 성장이 좀 더 빨랐다. 남자아이들은 몸도 생각도 좀 느렸다. 엄마 손이 좀 더 많이 간다고나 할까. 학교에서 잃어버리는 물건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아들을 키우면서부터인지, 나이가 들면서부터인지 내 페미니즘은 많이 옅어졌다. 좋은게 좋은거지 하는 태도가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데, 이젠 더는 싸우기 싫다는 마음 반과 어차피 세상은 내가 행동하지 않아도 변하고 있다는 마음 반이었다. 이미 회사라는 조직을 나와서 살고 있으니 남녀차별이나 유리천장은 좀 멀어진 이야기가 된 것도 있을터였다.


게다가 요즘엔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느낀다. 느리지만 확실히 변하고 있다. 남자들이 육아휴직을 내는 것이 더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있으나마나한 제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남성들도 늘었고, 아이가 아프다고 회사에 알리고 연차를 내는 직원들도 늘어났다. 그게 더는 눈치볼 일도 아니었다. 요리 잘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여자들도 많고, 아내에게 아침밥을 차려주고 출근한다는 남자직원도 있었다. 모두 싱그러운 젊음으로 새로운 세대교체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들보다 어린 내 아이 세대는 또 다르지 않을까?


남녀 차별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남녀가 다르다는 편견을 가지고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여자아이들이 수행을 잘 챙긴다던가, 꼼꼼하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입시 설명회를 가봐도 남자 아이들의 경우 수행이 여학생보다 불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였다. 이 이야기를 집에 와서 이야기 하다가 큰 애한테 호되게 혼났다.


“엄마 그건 편견이야. 잘 챙기는 여학생이 있는 것일뿐이야. 남자 아이들 중에도 잘 챙기는 애들은 많아.”


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오십줄의 나는, 벌써 편견을 가진 어른이 된 걸까? 이후 내내 아이의 말을 곱씹어 보게 되었다. 겉으론 아이의 말에 수긍은 했지만, 나는 속으로 여전히 여자와 남자를 가르고 있었다. 물리적인 힘까지도 공정하다고는 할수 없지 않나? 결국 각 성별의 특성은 있는 것이니까 하고 속으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남녀차별에 관해 유난히 분개하고 예민해하던 내 모습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나도 모르게 두루뭉실하게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도 혹시 아들과 분리되지 못하는 진상 시어머니가 될 상인지, 걱정도 되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가끔은 내 아들이 역차별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특히 성에 관해 그렇다. 사귀는 여성과 결별 후에 여자쪽에서 성추행이나 성폭력으로 고발당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기도 하다는 말도 들었다. 때문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서로 사귀면서도 합의하에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겨놓는다고 한다. 성희롱은 상대방이 성적 수치심을 느끼면 바로 범죄가 되니까.


이렇게 걱정한다고 한들, 뭐 답은 없다.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분명히 달라질텐데, 어떻게 변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 나는 늙어가고 세상은 무섭도록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까.


‘나는 왜 이렇게 보수적이 되었을까’와 아들과의 관계에 대해 걱정하다가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다만 페미니즘에 대해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아들을 가진 엄마의 페미니즘은 딸을 가진 엄마의 페미니즘과 조금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내가 여자로서, 딸로서 가졌던 페미니즘은 평등과 공평함에 무게를 두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이익과 애정에 분노했던 것이다. 그런데 꼭 저울질 하듯 공평해야 페미니즘은 완성되는 것일까?


세상은 변하고 있지만, 아직도 무의식 중에 남과 여를 가르며 여자의 한계를 긋고 있는 제도와 말은 도처에 깔려 있을 것이다. 내 아이는 성별이 남자이니 다른 차별은 느껴도 아마도 남녀차별에 관한한 덜 느끼고, 덜 제한을 받을 것이다.


평등과 공평은 넓게 보면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다.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 그것이 몸에 배어 있다면, 그것이 공동체에 널리 퍼져 있어서 누구나 수긍한다면 페미니즘은 더는 필요 없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더는 필요없는 개념이 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이런 관점으로 보자면 결국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의 다른 말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부당하게 차별받지 않는 공정함과 더불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줄 아는 마음. 이런 능력은 앞으로 AI가 다가올 세상에서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아이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세상을 잘 꾸려갈지도 모른다. 혹여 아들들이 상처를 받지 않을까, 혹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엄마지만, 나보다 더 유연한 사고를 지닌 아이들이 고정관념을 깨며 그들만의 세상을 열심히 만들어 나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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