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빈곤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직장인이 뭐 어때서

by 이틀
왜 이렇게 회사 생활을 오래 했을까?


18년. 그렇게 오래 회사 생활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 입사할 당시 나에게 시급한 문제는 빈곤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잠잘 곳이 없었다. 부모님이 사는 집이 있었지만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씻기 위해 가끔 집에 들어가기는 했었다. 연구실 프로젝트를 하면서 대학원 학비를 해결했고, 여학생 기숙사에서 잠을 자면서 논문을 썼다. 기숙사의 쪽잠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편하진 않았다. 그런데 마음은 편했다. 집은 마음이 불편했다. 빈곤은 마음을 많이 불편하게 했다.


졸업을 하고 바로 취업을 했다. 유학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박사과정으로 진학하는 친구도 부러웠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도 있는데, 하고 싶은 것을 걱정 없이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워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시험을 준비하거나,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나에겐 사치였다. 취업을 했다. 이력서를 한 30군데쯤 냈던 것 같다. 나에게 취업은 생존이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3개월, 모아놓은 약간의 돈으로 방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신림동의 원룸촌이었고, 월세였다. 창문을 열면 바로 옆 건물의 빨간 벽돌이 보이는 집이었지만, 내 몸 하나 뉘일 곳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기쁘기도 했다. 아무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히 잘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비로소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 직장은 나에게 절대적 빈곤을 벗어나게 해 준 셈이다.


그 뒤에 전세와 매매를 거쳐 지금은 자가로 거주 중이다. 집주인이 나가라고 할 염려 없고, 거실로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집이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꿈을 꾸라는 말, 용기를 가지라는 말, 그건 일단 살아남 고나서야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다. 일단 절대적 배고픔은 견디고 나서야 꿈도 다가온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인생이라는 것이 계속 상승곡선만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거쳐, 나는 워킹맘이 되었다. 워킹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대부분 자아발견이나 혹은 일이 좋아서 하는 커리어우먼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이미지는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었다. 아이를 임신하면서 시작한 남편의 사업이 해가 갈수록 돈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둘째를 낳았을 때, 우리 수중에는 월세 보증금만이 겨우 남았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전업맘이냐 워킹맘이냐 고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는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일터로 나가 돈을 벌지 않으면 가족이 모두 거리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아이들을 시댁의 도움을 받으며 키웠고, 열심히 일터로 나가 돈을 벌었다. 경력단절 여성들도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내가 워킹맘을 독하게 버티면서 그들을 부러워했던 건 사실이다. 나도 내 꿈을 절박하게 원했었으면... 워킹맘이 되면서 나에게 꿈을 위해 정진하는 일은 다시 사치였다. 매일, 빚을 갚고, 돈을 모았다.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나에겐 직장인 경력 18년이라는 경험이 남았다. 18년이나 다녔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18년을 다니면서 인생의 굴곡을 많이 겪다 보니 오래 다닌 줄도 모르게 18년이 흘렀다. 나는 매 순간 내 인생에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18년이나 직장을 다니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 매일 열심히 살다 보니 18년이 흐른 것이다.


지금은 비록 은행 대출이 절반 이상이지만,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거실에 아이들과 행복한 일상을 지지고 볶는다. 물론 대출을 받을 때 회사에서 받는 월급을 계산해서 대출금액이 나왔고, 거주할 수 있는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직장은 나에게 다시 한번 절대적 빈곤을 겪지 않게 해 주었다. 월급 덕분에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고, 월급 덕분에 아이들에게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게 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월급이라는 것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동아줄 같은 것이라는 점인데, 이 점을 부각해 가끔은 썩은 동아줄처럼 회자되곤 한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 당장 끊어지는 줄은 아니다. 다만, 내가 한 가지만 붙들고 있을 때, 위험 대비가 되지 않을 뿐, 직장에서 주는 월급은 절대적 빈곤을 벗어나게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생계수단이다.


만약, 월급으로 최소한 인간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회사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 창업도 좋지만, 일단 몸값을 높이면서 이직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본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 꿈을 이루는 일은 회사를 다니면서 준비해도 충분하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가족과 인생을 담보로 하는 창업보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만드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수월하다. 인생,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된다. 100세 시대, 천천히 가도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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