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을 포함해 모든 엄마들의 기본 감정은 미안함이다. 워킹맘으로 살면서 왜 미안해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미안해하지 말라는데, ‘자꾸 미안해지는데 어쩌라고?’ 되묻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좀 미안해해도 된다. 단, 자괴감에 빠지지 않으면 된다. 미안함은 부끄러워해야 할 감정이 아니다. 나는 아이가 크고, 워킹맘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미안한 감정을 빠져나왔다. 감정이라는 것이 억지로 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억지로 누른 감정은 또 다른데서 다른 형태로 폭발할 뿐이었다. 죄책감, 자괴감, 우울감 등으로 말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미안함을 끌어안고 살았다. 부부싸움을 하는 부모님을 보며 어려서는 부모에게 짐이 되어 미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는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이와 함께 있어주지 못한다는 심리적인 미안함은 둘째치고라도 아이보다 일과 회사를 먼저 생각해서 미안했다. 아이가 수족구라도 앓으면 아이의 걱정과 동시에 어린이집에 일주일 정도 등원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 먼저였다. 그 걱정이 미안했다. 회사에 미안한 것은 덤이었다.
미안함은 끝이 없었다. 감정에 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책과 전문가들의 조언은 미안해하지 말라고 하는데,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기엔 내공이 부족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짐이라는 미안함이 자동으로 장착되어 있는 나는 미안함의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지 몰랐다. 미안해하지 말라는 조언은 나에게 효과적이지 않았다. 미안함이 자꾸 느껴지는데, 어떻게 미안해하지 않나. 어려웠다.
미안함은 자괴감을 동반했다. 자괴감을 인터넷 사전에서 찾아보니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미안하다는 마음 배경에는 남들처럼 하지 못해서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잘 챙기지 못해서 미안했다. 회사에서는 늘 먼저 퇴근해서 미안했다. 집에 오면 아이를 봐주시는 시어머니께 미안했다. 주변에 미안한 사람들 천지였다. 열심히 사는데도 왜 자꾸 미안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보고 유리멘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열심히 살고 있으니 위로를 받을 것 같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가슴에 칼을 꽂는 말들도 많이 들었다.
“자꾸 미안해하니까 애가 그런 거야.”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
“나 같으면 남편 같은 사람하고 결혼 안했을 것 같아. 왜 그 사람하고 결혼했어?”
“일 그만두면 되잖아!”
힘들게 짐을 지고 가는 사람에게 짐을 더 얹어주는 말들이었다. 살면서 보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상처를 많이 주더라. 지금 그런 말을 듣는다면 뭐라고 대꾸라도 했을 텐데, 당시에는 내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주저앉고 싶을 때였다. 말대꾸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체력적으로 바닥이었다. 아마도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 지인들은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도 못할 것이다. 상처만 내 가슴에 남았을 뿐.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미안함은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이었다. 타인에게 말을 하고 조언을 얻는 것보다 그냥 미안함을 느끼는 게 나았다. 시간이 지나 미안함이라는 감정은 옅어지는 것이었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단 내 체력이 좋아졌다. 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아이들이 어릴 때는 밤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이가 밤에 잘 깨기도 했거니와 이유 없이 울기도 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저 달래는 수밖에……. 아이가 아픈 날에는 날 새기 일쑤고, 그렇게 다음날 출근을 해서 일을 했다. 중요한 회의를 하고, 의사결정을 하고, 사람들과 협력하고, 싸우기도 하고,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다가 야근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금은 아이가 커서 밤에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잠을 자기도 하거니와 내 에너지를 한 곳에 쏟지 않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한다.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 과정에서 회사에서 전배를 몇 번 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회사에서도 바쁜 조직이 있기 마련이다. 그 바쁜 조직에서 더 일을 하다간 내가 직장생활을 오래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일과 가정생활을 양립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전배를 했다. 이것도 왠지 회사에 미안하고 동료에게 미안했지만, 정작 미안한 일은 내가 일을 그만둔 나에게 가장 미안해할 것 같았다. 일을 그만두면 후회할 것 같았다.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 여겼다. 육아휴직과 전배로 인해 평가는 엉망이 되고, 때로는 인센티브도 받지 못하는 직장인 열등생이 되었다. 상관없었다. 대신에 다른 것을 얻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얻은 것은 시간이었다. 무조건 야근이 기본인 조직을 떠났고, 회사와 집이 가까워졌다. 얻은 시간으로 운동을 했다. 시간이 생기니 내 몸을 돌 볼 여유가 생겼다. 비타민을 챙겨먹기 시작 했고, 나를 가꾸기 시작했다. 물리적으로 체력이 조금 나아지자 마음도 조금 단단해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미안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론 아이들이 커가면서 익숙해진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7살 때인가 둘째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엄마들이 데리러 오는데, 나만 할머니가 오잖아.”
아마, 이전 같았다면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답을 해준다.
“엄마는 일해야 해. 회사를 다녀야 하니까 데리러 갈 수가 없어. 엄마는 일이 좋거든. 할머니조차 안계시면 너 혼자 와야 해. 설마 그러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
“엄마는 일이 더 좋아? 난 놀이터에서 놀고 싶단 말이야!”
“엄마는 일도 좋아하지만, 너도 사랑해. 그건 비교할 게 아니야. 놀이터에서 놀고 싶으면 할머니께 이야기해서 놀아.”
7살 아이가 알아듣든 말든 나는 나의 말을 했다. 아이가 이해해줄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건 아이의 몫이다. 나는 아이를 사랑하고, 내가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있으니까.
시간으로 체력을 챙겼고, 체력이 좋아지니 마음도 단단해졌다. 경험해보니 몸과 마음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력으로 버틴다는 이야기는 체력으로 버틴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미안함을 느끼지 말라는 이야기는 어지러워서 서 있기도 힘든 사람에게 어지러움을 느끼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지러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앉을 의자다. 잠시 쉬면서 어지러움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 말이다. 그 의자를 아무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쨌든 미안함을 과도하게 느끼고 있다면 지금 조금 쉬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워킹맘들의 미안함은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다. 육아를 쉽게 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일단 엄마탓부터 하고보는 문화가 팔할 이상이라고 본다. 우리 좀더 남탓을 해도 된다. 자신을 탓하는 건 충분히 했을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