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도 원했고, 일도 원했다

by 이틀

첫째를 낳고 복직하기 한 달 전쯤, 대기를 걸어놓았던 구립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임신할 때부터 대기를 걸어놨기 때문에 당연히 기뻐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적응 시켰다. 물론 아이는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 조그만 손아귀에서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앞에서 나 또한 울면서 뒤돌아서곤 했다.


미안함에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오는 시간에는 놀이터에서 놀았다. 어느 날, 동네 엄마가 아는 체를 했다. 자기 아기랑 개월수가 비슷한 것 같다면서 말을 걸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복직후를 대비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적응시키는 중이라고 했다. 동네 엄마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 어린 아이를……. 말도 못하는데 어린이집에 맡긴다고요? 너무 불쌍하다.”


그 말을 듣고 있는 나는 불편해서 자리를 떴다. 그 말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맡겨야 하는 내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그나마 시설과 보육 면에서 가장 믿을만하다는, 들어가기도 어렵다는 구립어린이집이라서 마음을 쓸어내리고 있는 나에게, 그 엄마의 질문은 비수가 되었다. 그 뒤로 그 엄마랑 이야기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나는 어린이집에 계속 맡기고 복직준비를 하고, 복직하느라 시간대가 그녀와 맞지 않았다. 어쩌면 가장 최초로 만난 동네 엄마와 그렇게 친해질 기회를 놓친 건 앞으로 워킹맘으로 살아갈 내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도 몰랐다.


결혼 4년 만에 임신을 했다. 4.년.만.에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임신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에서 과연 ‘엄마’라고 불릴 날이 있을까 싶었다. 처음 결혼할 때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나의 어린시절은 불행했다. 늘 부모님의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또한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일찍 결혼해서 모임에 아이를 데리고 나와도 어른처럼 아이와 ‘안녕’하고 인사만 나눌 뿐, ‘내가 한 번 안아볼게’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아이와 놀아주는 법을 몰랐다. 남편은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직보다 자신의 일을 하고 싶어 했고, 모험을 좋아했다. 둘의 암묵적인 합의는 ‘아이를 낳지 말고 살자’였다.


먼저 아이를 낳자고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솔직히 왜 아이를 낳고 싶어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날 부터인가 남편을 꼭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나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남편에게 아이를 낳자고 말하니 남편의 첫 마디는 이랬다.


“아이를 낳으면 다시 뱃속으로 되돌릴 수 없는 거 알지?”


되돌릴 수 없는 것을 알면서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결심했으나 결과는 따라주지 않았다. 운명은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기는 내게 오지 않았다. 우리보다 늦게 결혼한 사람도 척척 임신이 되는데, 나는 아니었다. 결심한다고 아무나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주변 지인들의 임신소식에 기꺼이 즐거워해줄 수 없었던 내 얄팍한 마음이 지금도 생각난다. 질투심에 불타서 임신한 여자는 보고 싶지도 않은 시간이 있었다.


일하면서 불임클리닉을 다녔다. 해보지 않은 검사가 없고, 해볼 수 있는 걸 다 해보고 마지막 관문인 시험관을 앞두고 있었다. 그때 기적같이 자연적으로 첫째가 찾아왔다. 지금도 기억한다. 별처럼 빛나던 초음파속의 아기 심장을. 왜 사람의 영혼을 별에 빚대어 말하는 지 그때 알았다.


기쁨과 동시에 고민이 밀려왔다. 당시에 나는 해외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일하는 중이었고, 한 달에 1~2주는 출장을 가야 한다. 비행시간은 4시간 정도로 짧았지만, 새벽에만 다닌다는 것이 문제였다. 보통 밤 12시에 비행기를 타서 새벽 5시쯤 인천공항에 도착하곤 했으니까. 임산부에겐 무리한 일정이었다. 일과 아이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아이를 선택했다. 프로젝트는 중도에 다른 인력으로 교체되었다. 이때의 선택은 쉬웠다. 일은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착각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의 여자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으니까.


아이를 낳고나니 다시는 해외 프로젝트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간혹 회사에서 해외 프로젝트 경험 인력 조사 메일이 날아오곤 했다. 해외 프로젝트 경험 인력 관리용인데 차후 해외 프로젝트 투입의사를 묻는 항목에는 늘 ‘X’표시를 해야 했다. 아이를 두고 몇 주 혹은 몇 달씩 해외에 나가 있을 용기가 없었다. 아이는 엄마가 필요했지만, 엄마인 나도 아이가 필요했다.


엄마가 된 이후에 고민은 ‘어떻게 하면 오늘도 버틸 수 있을까’였다. 일 뿐만 아니라 마음을 잡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몸은 회사에 있으나 마음은 늘 집에 두고 왔다. 신입사원 시절 이후 화장실에서 우는 건 끝나는 줄 알았다. 엄마가 되고 복직을 하고 난 이후, 나는 또 화장실에서 숨죽여 우는 일이 많아졌다. 울고 나서는 눈은 벌겋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자리에 앉아서 이를 악물고 또 일을 했다. 버티는 게 일이었다.


어쨌든 그 시간들을 지나, 나는 지금도 일을 하고 있다. 고백하자면 지금은 버틴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크면서 수월해진 것이 가장 큰 이유일테지만, 그 시간들을 지나면서 회사에서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마음을 내려놓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은 좋아했지만 사내정치는 좋아하지 않았다. 임원이 되거나 높은 위치로 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물론 학벌이나 능력도 임원감이 아니다. 나는 얼마간의 월급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면 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나는 일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스스로 자평해 보건데, 베스트는 아니지만 70점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야 늘 100점을 외치지만, 모든 사람들이 모든 영역에서 100점은 아니다. 회사라는 곳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서로의 영역에서 시너지를 내면서 가는 곳이다. 어느 영역에서 나는 100점이지만, 어느 영역에선가는 40점이다. 평균을 내면 70점. 딱 그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회사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동안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컸다. 빛의 속도로 컸다. 아이들이 자라는 순간은 찬란하게 빛나서 스냅샷처럼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다. 뱃속으로 다시 되돌릴 수 없다고 말했던 남편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친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그도 나도 부모가 되는데 서툴렀다. 좌충우돌하며 회사에 적응하듯, 부모가 되는 과정에서도 좌충우돌 했다. 가끔 남편과 이야기 한다. 부모가 되는 건 어렵지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지금 내 삶은 내가 원하던 삶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둘이나 얻었다. 그토록 원하던 일도 계속 하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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