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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틀 Sep 01. 2020

옷장 속 꽃바람

40대 중반의 어느 날, 내 마음에 꽃바람이 불었다. 나는 꽃무늬에 꽂혔다. 하늘하늘한 원피스, 발목까지 살포시 내려오는 랩스커트. 거기엔 모두 꽃무늬가 앉아있다. 그렇다. 나는 어느새 꽃무늬 신봉자가 되었다.


꽃무늬에 꽂힌 날부터 온라인 쇼핑몰에서 ‘꽃무늬 원피스’, ‘꽃무늬 랩스커트’, ‘꽃무늬 주름치마’, ‘꽃무늬 블라우스’로 검색을 했다. 검색창에 '꽃무늬'로 시작되는 단어가 최근 검색어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살까 말까 고민을 한다. 누군가 그랬다. 살까 말까 고민할 때는 사지 말라고. 그런데 나중에는 살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저질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다가 ‘돈도 버는데 이 정도는 나에게 투자해도 되지 않아?‘라는 핑계. 결정적으로는 친하게 지내는 A의 꽃무늬 옷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옷에 결재 버튼을 눌렀다.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할 때마다 내 옷장에는 꽃무늬 옷이 쌓여 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입어 봐도 온라인 쇼핑몰에서 사진에서 보았던 모델 핏이 나지 않았다. 꽃무늬 주름 스커트를 입어봤더니 배가 볼록 튀어나왔다. 치마에 잡힌 주름이 배를 탄탄하게 잡아주면서 반사적으로 아랫배는 더 볼록하게 만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건 좀 너무하잖아.


게다가 A의 허리는 25인치. 나보다 한 살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에 군살 하나 없이 잘록한 허리를 유지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도 34, 25, 36인 것 같은 몸에 키는 170cm. 나도 키는 170cm인데 나의 몸은 30, 30, 30이다. 일명 통허리인데 잘록한 허리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지경을 넘어서 간혹 밥을 많이 먹으면 가슴보다 배가 더 나온다. 더욱 억울한 건 A는 잘 먹고, 많이 먹는다. 운동하는 시간은 나와 비슷하거나 혹은 적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34, 25, 36을 유지하고, 인바디를 체크해보면 근육량이 이미 평균치 이상이다. 이건 좀 억울하다. 더 노력해야 하는 체질이라니. 


나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친하게 지내니 A와 나를 동일시했고, A의 옷을 보고 나도 그런 핏이 나오리라는 착각.


이미 옷장 속에 쌓여있는 꽃무늬들을 어쩌나. 그러다 이리저리 궁리해서 날씬해 보이는 코디를 마련했지만 통허리의 핏은 피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다. 옷에 몸을 맞추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다이어트의 시작이었다. 그전부터 다이어트는 해왔지만 본격으로 하지는 않았었다. 본격적으로 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음식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 그러했고,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푸는 성격이었다. 특히나 스트레스에 취약할 때 먹어주는 달달한 디저트는 어쩌나. 이런저런 생각 할 틈에 그냥 나는 꽃무늬를 생각했다. 저것들을 입고야 말겠다.


결국 8킬로그램 정도의 몸무게를 감량했다. 그럼 그 뒤로 꽃무늬들은 햇빛을 받으며 활개를 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글로 길게 풀어내지도 못했겠지. 살을 빼도 커지지 않는 가슴과 잘록해지지 않는 허리는 8킬로그램 정도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내게 일러주듯 그 자리를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아니, '있다'라고 현재형으로 써야겠다. 어떻게 해도 A의 가슴과 허리를 쫓아갈 수 없었다.


나는 왜 꽃무늬에 꽂혔을까? 불현듯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기서 호칭은 무조건 ‘어머님’으로 해. 그래야 친근해 보여. 그리고 나이가 한 50정도 되어가는 아줌마를 보면 일단 꽃무늬를 들이대. 조금 화려한 게 좋아. 나이 든 사람들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거든. 그래야 지갑을 열 확률이 높아져."


백화점에서 중년 여성의 옷을 팔던 매장이었는데, 매니저가 첫날 일러준 팁이었다. 나는 그것을 사전처럼 머릿속에 콕 박아놓고, 조금이라도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오면 빨간색, 노란색 등등 꽃무늬가 그려진 옷을 “어머님~”하면서 들이밀곤 했다. 간혹 “내가 왜 당신 어머님이야~”하면서 불쾌감을 드러내는 손님도 있었고, “이건 너무 화려해서 할머니 같다.”고 말하는 손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매니저의 말이 맞았다. 그때 세상의 많은 여자들이 어머님이라는 호칭이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고, 나이가 들수록 화려함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마흔 중반, 나는 내 옷장을 열어보며 내 나이를 다시금 가늠해본다. 20대, 혹은 30대까지 나의 옷장은 무채색 일색이었다. 대부분 어두운색이거나 아무 무늬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알았겠지. 굳이 옷으로 화려하지 않아도 내 젊음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나의 옷장은 조금씩 화려한 색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흰색부터 시작해서, 노란색, 연두색, 분홍색, 그리고 꽃무늬.


꽃무늬 옷을 살 때의 내 마음을 살펴보니, ‘이제라도’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더 늙기 전에 내가 원하는 옷을 입어보리라. 이제 아니면 언제입겠는가, 뭐 그런 마음이랄까. 백화점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어머님'이 이런 마음이었겠지? 내가 꽃무늬 옷에 꽂힌 날부터 길거리에는 꽃무늬 원피스가 가득하다. 꽃무늬가 유행인가 싶지만, 내가 꽂혀있으니 꽃무늬만 보일 수밖에. 그래도 상관없다. 지금 즐기지 않으면 언제 즐기겠는가.


A의 가슴과 허리를 쫓아가지 못하더라도 꽃무늬 옷을 열심히 입기로 했다. 남편이 간혹 마트갈 때 입는 옷 같다며 팩트 폭격을 날리지만, 상관없다. 이런 여자가 좋다고 결혼한 건 남편의 선택 아니던가. 게다가 남편 좋으라고 입는 옷이 아니고 내가 즐기는 꽃바람이다. 휴직으로 인해 한동안 누구에게 보여줄 기회가 많이 부족하겠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쿰쿰한 옷장에서 꽃무늬 옷들을 꺼내련다. 말간 햇빛과 싱그러운 바람을 마음껏 맡게 해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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