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틀 Sep 07. 2020

버스 안내양을 아십니까?

지금은 주교통수단을 지하철로 하고 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먼 통학거리를 이동한 건 버스였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경기도에서 갑자기 서울로 이사를 했다. 좋은 이사는 아니었다. 아빠가 운영하던 양복점 가게가 망하게 되면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 동네를 떠난 것이었다. 서울이라면 뭔가 다시 새로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모님의 판단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적응하지 못했다. 서울에서도 양복점 운영은 그저 그랬고, 엄마는 새로운 도시에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낯선 골목에서 나는 늘 혼자 놀았다. 같이 놀자고 친구네 집 초인종을 한번 누른 적이 있었는데, 친구 엄마가 말했다. "OO이 지금 없다." 안에서는 OO이와 반 친구들이 노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서는 내 마음이 무안했다. 그 뒤로 나는 주로 혼자 놀았다.


우리 집은 다시 경기도로 이사를 했다. 전학은 다시 가지 않았다. 즉,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경기도에서부터 서울까지 통학을 했다. 그때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것 같다. 다시 경기도로 전학을 시키지 않으신 이유를 물어보진 않았다. 그때 기억으로 교육은 서울이 낫다는 판단을 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내 기질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니 그냥 놔두신 것도 같다. 버스로 이동거리는 편도 30~40분 거리였다.


문제는 차비였다. 당시 초등학생 차비는 60원(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이었나? 아무튼 오십 원짜리와 십 원짜리 동전이 몇 개 필요했는데, 시 경계를 넘어가면 2배를 내야 했다. 즉, 나는 경기도 OO시에서 서울시로 매일 경계를 넘어 다녔으니 왕복으로 치면 꽤 큰돈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늘 60원만 주셨다. 돈을 더 달라고 하면 "서울에서 탔다고 말해"라고 했다. 맏이인 나는 팍팍한 살림을 아는 터라 그냥 돌아서서 학교에 가곤 했다. 


당시엔 안내양이 차비를 걷으러 다녔는데, 차비가 들통이 날까 봐 늘 조마조마했다. 가끔 기억력이 좋거나,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안내양을 만나면 버스 안에서 엄청 창피를 당해야 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와중에 차비를 덜 낸 학생이 되어 온갖 잔소리와 꾸중을 들어야 했다. 가끔 안내양의 화풀이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 중간에 내리라고 하는 안내양은 없었다. 중간에 내리면 그야말로 미아가 될 수도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몇 번의 무안을 당한 이후, 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돈을 챙기게 되었다. 친척분이나 부모님 친구분에게 용돈을 받게 되면 항상 비상금을 마련해두었다. 비상시에 차비를 내기 위해서. 책가방의 맨 앞 지퍼에는 혹시나 차비를 더 달라고 하는 안내양이 있으면 주기 위해 십 원짜리 동전이 늘 쨍그랑거렸다. 그 뒤로 무안당하는 일이 없냐고? 아니다. 나중에 차비를 더 내면, 알면서 안 냈냐고 또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돈을 덜 내고 시경계를 넘어갈 수 있으면 그렇게 했다. 매번 2배의 차비를 내면 용돈이 빨리 떨어지니까. 


이후 안내양이라는 직업은 어느 순간 버스에서 사라졌다. 회수권이라는 것이 생겨났고, 토큰이라는 것이 생겨났고, 어른인 지금은 교통카드라는 것이 생겨났다. 교통패스를 구입하는 순간부터 입력해야 하는 생년월일과 기계로 처리되는 거리 덕분에 내가 어릴 적 경험했던 그런 불법(?)은 이제 없을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안내양이라는 직업이 사라졌을 때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지금 내 아이들은 모두 5분 거리의 초등학교에 다닌다. 가끔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이만할 때 그 먼 거리를 통학했었나 싶어 어린 시절의 내가 스스로 대견해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엄마가 나를 참 강하게 키웠구나 싶기도 하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면 그냥 안아주고 싶다. 가난이 힘들게 했을 어린 마음을 그냥 안아주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옷장 속 꽃바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