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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틀 Aug 23. 2019

엄마의 밥상, 지금에서야 알겠다

엄마에게 밥은 자신이 마지막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사랑이 아니었을까

“김장하려면 지금 고춧가루를 사놔야 하는데……."

“김장하지 말라니까. 힘들어. 우린 사먹을 거야. 동생도 사먹는다잖아. 그러니까 하지 마.”

“사먹으면 고춧가루를 뭘 쓸지도 모르고 위생도 그렇고…….”

“엄마, 요즘이 옛날인줄 알아? 요즘 업체들 다 깨끗하게 잘해. 중국산 고춧가루도 맛있어.”


매년 같은 실랑이다. 엄마는 여름부터 김장준비를 한다. 햇마늘과 고춧가루, 저장용 양파까지, 겨우내 먹을 양식을 준비하니 그 정도는 감수를 해야 한다는 식이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엄마와 나는 같은 실랑이를 계속 한다. 엄마의 반응은 매년 같다. '너희들이 그렇게 말해도 나는 하겠다.'였다. 엄마는 작년에도 몇 달 전부터 김장을 준비했다. 동네 아줌마들과 품앗이를 해서 김장을 했다. 그리고 전화를 했다. 김장을 해 놨으니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럼, 염치없게도 나는 또 김장을 가지러 친정에 갔다.


염치없는 것은 김장을 가지러 간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엄마가 해 놓은 보쌈도 먹고, 김장 이외에 담가둔 깍두기와 냉장고 속에 있는 묵은지까지 탈탈 털어서 집으로 가져왔다. 엄마는 늘 그렇듯이 딸들에게 남김없이 모두 퍼주었다. 김장을 사먹겠다고 선언한 것 치고는 얼굴의 두께가 많이 두껍다. 김장을 가지고 오면서 엄마에게 한 마디 건넸다.


“역시 엄마가 한 게 맛있긴 하다.”


김장을 사먹겠다고 큰 소리친 뻘줌함을 달래기 위한 발언인 줄 알면서도 엄마는 그저 웃었다. 김장을 한 가득 차에 싣고 돌아오는 길, 엄마가 젊고 내가 어렸던 시절, 그 시절의 엄마를 가끔 생각한다.


엄마는 음식에 관한한 푸짐한 분이셨지만 자식들에게 모진 말을 참 많이 했던 분이다. 덕분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엄마는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매일 부부싸움이 끊이질 않았고, 우리 자매들은 매일 울면서 학교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부부싸움 끝에는 늘 우리들에게 아빠에 대한 원망과 우리들에 대한 원망을 쏟아놓았다. 결혼을 괜히 했다거나, 아이들을 괜히 낳았다거나, 아이들만 없었더라면 자신이 행복할 것 같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부부싸움 할 때 무슨 말인들 못하랴, 싶겠지만 어릴적 그 이야기를 듣는 나는 늘 울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혹시라도 엄마가 나를 버리면 어쩌나, 하는 공포.


누군가 나보고 그랬다. 그런 환경에서도 참 반듯하게 컸다고. 글쎄, 반듯한 건 잘 모르겠고, 그나마 사회에서 내 몫을 하며 살 수 있었던 건 엄마의 밥 덕분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엄마는 말은 모질게 했어도 밥만큼은 정성스레 해주었다. 엄마가 요리하는 순간에는 집안에 평화로운 기운이 넘쳐났다. 그 가난하던 시절에 엄마는 석유난로에 음식을 하곤 했다. 난로에서 지글지글 된장찌개나 김치찌개가 끓는 냄새는 상처 난 내 마음에 약이 되곤 했다.


엄마는 음식 퍼주는 것을 좋아했다. 집에 오는 손님은 항상 밥을 먹고 가라며 후딱 밥상을 한 상 내오기도 했고, 이웃들과 밥을 나누어 먹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내 어릴 적 기억에 우리 밥상에는 늘 이웃집 아이나 엄마가 함께 했던 기억이 있다. 소풍날이면 김밥을 싸주었는데, 같은 반에 엄마가 없던 친구가 있었다. 늘 그 아이의 몫까지 김밥을 싸서 나에게 전달해주곤 했다. 한마디로 인정 넘치던 엄마였다.

    

한 번은 부부싸움을 하고 아침까지 엄마가 누워있었다.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도시락을 챙겨가야 했는데, 도시락은 빈 그릇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도시락 싸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등교를 했고, 등교하는 길에 다른 길로 샜다. 엄마, 아빠가 싸우니 내 마음도 우울했고, 도시락 없이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렇게 무단을 결석을 했다. 길거리를 배회하긴 싫어서 성당에 갔다. 조용한 가운데 한 숨 자다가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집에 갔더니 난리가 났다. 엄마는 도시락 없이 등교한 내가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늦게라도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온 것이었다. 학교에 와서 담임선생님도 엄마도 당황했던 것이다. 나를 찾고 난리도 아니었다.


엄마는 그날 나를 혼내지 않았다. 다 식은 도시락을 내밀며 배고프니 얼른 먹으라고만 했다. 하루 종일 허기진 나는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엄마를 잠시 보면서 엄마의 눈가가 발갛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보다는 밥을 입 속에 우겨 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날의 헤프닝은 그렇게 끝났다.


엄마에게 밥은 어떤 의미였을까? 밥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으면서도 밥은 놓지 않았던 엄마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엄마에게 밥은 자신이 마지막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사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가정이라는 울타리였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음식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나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알게 모르게 그 사랑을 받고 자란 것이었다. 밥은 나에게 엄마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사랑표현에 서투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기도 하다는 걸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알았다.

    

엄마가 해준 밥이 최고로 맛있다며 먹는 아이들의 입을 볼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다. 그리곤 내가 어릴 때 엄마의 모습과 많이 오버랩 된다. "엄마는 안 먹어?"라고 묻는 내게 "엄마는 배불러"라고 말했다.   

  

지금 내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는 안 먹어?”

내가 똑같이 대답한다.

“엄마는 배불러.”   


지금에서야 알겠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러니까, 엄마도 분명 나를 사랑했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겠다. 밥으로 인정을 베풀었던 덕에 제대로 크고 때때로 운도 좋았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겠다. 힘겨운 엄마의 인생에서 밥을 할 때만큼은 아이들에게 밥을 먹일 때만큼은 행복했으리라는 걸, 지금에서야 알겠다.


내 아이들도 알게 될까? 내가 사랑을 많이 표현했었다는 것을, 내가 만든 음식을 너희들이 먹을 때만큼은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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