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
심오하거나 혹은 허무하거나
1. 개봉한 지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지만,
내가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얼마 전 서울에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건물 창문에 휘날리는 눈발을 보며 나는 소영이 체포되던 장면을 떠올렸다.소영(윤여정)이 보여줬던 처연한 눈빛처럼 이 영화는 차갑고도 지독하게 쓸쓸한 분위기다.
이재용, 죽여주는 여자
2. 이 작품의 매력은 여러 가지 문제를 던지지만 그걸 심오하기보다는 아무렇지 않게, 또는 허무하게 그린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복잡하게 생각할 만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박카스 할머니, 트렌스젠더, 코피노 그리고 죽음까지 모두 심도 있게 이야기하면 자칫 관객들이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는 소재다. 보통 이런 소재를 다룬 영화는 진지하게 풀어나가거나, 혹은 발랄함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식의 전개가 다반사다. 반면 <죽여주는 여자>는 아젠다를 던지고 논의의 소재를 주는 게 아니라 시니컬한 연출로 담담히 풀어간다. 소영의 인생은 극적으로 상황이 좋아지지도 않으며, 그 주변 인물들도 환경이 급격히 변하지도 않는다. 대신 사회적 타자의 삶을 덤덤히 묘사한다. 마치 -우리는 원래 이렇게 살았어, 니들이 관심 안 가져서 그렇지- 라는 말을 건네는 듯 같다.
3. 영화의 대표 소재인 삶과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면 끝도 없이 심오해질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허무한 단어들이다. 영화를 보면서 심오한 감정과 허무한 감정이 반복적으로 요동쳤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영화 초반 우리는 소영을 통해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매춘을 하며 생명연장을 하고, 사회의 가장 취약한 존재들과 이웃인 그녀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어쩌면 코피노 아이를 곁에 두는 까닭도 그녀의 인생에 작은 희망이라도 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늙은 후의 내 모습은 어떨까. 숱한 고민들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 이어지다 소영이 ‘진짜’ 죽여주는 여자가 되는 순간 관객들은 충격을 받는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노인들이 어떤 인생을 살았건 죽음 앞에선 모두 같아진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아름다운 죽음이란 없으며 우리의 선택지는 덜 추하게 죽는 정도일 뿐이란 걸. 허무함의 연속이다.
4. 그래서 이 영화가 꾸역꾸역 마지막 ‘무연고’라고 적힌 유골 장면까지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자 봐, 어떻게 생각하던 죽음은 맞이하게 되어있어. 난 그저 죽음 가까이에 있는 노인의 삶을 보여준거야. 영화는 마지막까지 강렬히 말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관객들은 모두 소영의 죽음에 답할 의무를 지게 된다. 소영이 자신에 관한 뉴스를 보며 말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시대’에 사는 모두가 해당된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쉽게 왜곡될 삶, 그 중에서도 죽음이 가까운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시선을 가져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