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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기린 Jan 02. 2017

합리적 개인주의의 가능성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

나는 늘 배우면서 늙어간다. 그리스 철학자 솔론은 말년에 습관처럼 이 말을 했다고 한다. 배움에 끝이 없는 건 고대 그리스 때부터 있던 사실이라니 마음이 급 편안해진다. 내가 자주 배우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사회다. 대부분 암담하고 ‘개노답’인 사회 상황을 주로 접하지만 말이다. 인간의 추악한 면을 다양한 곳에서 접했다고 생각했는데 문유석 판사 앞에선 쪼렙이다. 책에서 언급하는 우리 사회 모습이 방대하여 독후감에 다 담을 수 없지만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되어 현실을 살아하는 것. 이 하나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다.

지성이 넘치는 주변인들 덕분에 아직은 생각보다 한국사회의 답답한 집단주의를 마주할 기회가 없다. 하지만 30대, 아니 20대 후반만 되어도 사회에서 마주쳐야 하는 것들이 있다. 군대문화, 지역감정, 인간을 레벨로 나누어 하등함을 느끼게 만들기에 사회 부조리는 덤이다. 그동안 배웠던 ‘상식’이 통하지 않고 ‘집단의 일개 구성원’으로 끽소리 못하는 암 흑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간접적으로 위에 해당하는 일을 모두 경험했는데 그때마다 속물이 되어야 할지 투사가 되어야 할지 매번 고민이다. 전자로 얻는 건 죄책감, 후자로 얻는 건 무기력함. 둘 다 술을 부르는 감정이다. 누구든 예지능력 없이도 이러한 한국사회의 문제가 심화되면 되었지 덜 하진 않을 걸 안다.

그래서 현실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잠시 벗어남으로 해소되는 감정은 일시적이다. 우울한 일로 술을 진탕 마셔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술을 마시고 몸부림쳐도 딱히 변하는 건 간의 건강 이외엔 없다. 뒷수습은 셀프다. 저자의 실사구시가 마음에 와 닿은 이유도 지금을 비관하기보다 제대로 알자는 내용이 좋아서다. 다만 저자가 제시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적당이 거부할 수 있는 권력도 필요하다.

연대와 합의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원론적인 답변지만 약하다. 합리적인 사고로 특정 부분에 의견을 제시하고 연대해도 정치력 효과는 미약할 확률이 높다. 연대에도 힘 차별이 존재한다. 연대 세력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부족하다면 민주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의견은 묵살되기 쉽다. 더구나 정치적 의사표현이 제한적인 한국에서는 합의, 연대가 희망적인 제시이나 개인주의자로 사는 해법은 아니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개인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루소가 안다는 것은 무지에 가까울 정도로 부질없다는 데 책으로 공감했던 내용이 부질없을까 봐 두렵다.


한창 패기 넘치는 2학년 때, 전공 교수님한테 질문한 적이 있었다. “교수님, 이것도 가정하고 저것도 가정하면 현실에서 경제 이론이 먹히긴 하나요?” “당연히 안 먹히지! 학부에선 잘 안 배워.” 경제학과 왔더니 죽창 그래프만 그리고 계산해서 짜증 났는데 비현실적이라니깐 더 짜증 났다. 공부 못하는 학생의 치졸한 변명이다. 사실 난 항상 비관하고 욕해도 사회가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더 많이 비관하려는 건 아닌 거 같고 내가 어떻게든 움직였을 때 무언가 좋게 바뀌길 소망해서 인 거 같다. 합리적이고 이해 가는 사회에서 개인주의자로 사는 가능성. 문유석 판사와 내가 기대하는 건 바로 이 가능성 아닐까. 현실에서 내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는 개인주의자. 그 가치가 사회에도 도움되길 바라는 한 명의 시민. 나는 늘 가능성을 기대하며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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