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읽어도 이해가 쉬운 문장이 좋은 글이라는 말에 절반만 동의한다. 나는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쓰는 작가는 못 된다.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수강 이유에 대해 타인을 배려하는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늘 내 입장, 생각에 대한 글을 쓰면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평소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곁가지 서술의 필요성을 못 느꼈던 탓이다.
일상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다. 읽는 사람을 배려하는 글, 오감을 사용하는 글, 나만이 쓸 수 있는 글, 삶이 글이 되는 일상 작가가 되고자 했다. 평소 내 글이 어렵다, 쉽게 쓰라는 피드백을 받을 때면 오만한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글 취향이 달라서라고 항변했다.
작가 수업에서 내가 쓴 글을 직접 읽고 수강생들의 피드백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무심코 썼던 샤슬릭이라는 단어에 대한 피드백을 들었다. 샤슬릭이 어떤 음식인지 몰라서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아서 검색해봤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아차, 싶었고 내가 또 불칠전한 글을 썼구나 싶은 반성을 했다. 간과하기 쉬운 부분을 알려주셔서 감사했다. 샤슬릭 옆에 괄호를 넣어 러시아 꼬치구이를 넣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설거지 중 문득 ‘나는 왜 친절한 작가가 되려고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읽어도 이해가 되는 쉬운 문장이 좋은 글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읽었던 책들은 친절하지 않았다. 나는 매번 사전을 뒤적이며 나만의 단어장에 기록했고, 이미지를 검색했다. 쉽게 쓰지 않은 작가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런 글들을 통해 성장했고, 배웠다. 내가 모르는 단어와 내용을 발견할 때는 ‘문학적 오르가슴’을 경험했다.
읽기 쉬우면서도 통찰을 제공하는 문장은 분명 좋은 글이다. 그러나 나는 글에 사족을 넣고 싶지 않아졌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을 바꿨다. 쉬우면서 통찰을 제공하는 글을 쓰지 못할 바에는 조금 불친절하더라도 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은 책에 견줄 함양을 갖추지 못한 채 겉멋이 들었다고 해도 괜찮다. 기꺼이 수용하겠다.
독서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통찰, 위로, 성장 등 독자에 따라 목적도 아웃풋도 다를 것이다. 나는 독서를 통해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자 한다. 독서를 통한 아웃풋으로 글을 쓴다. 그렇다면 독서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달라야 한다. 독서를 통해 알게 된 것을 내 글에 녹여야 한다. 몰랐던 단어나 배움을 써야 한다. 그래야 오롯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다. 궁극에는 내가 했던 모습을 독자에게 돌려주는 글을 써야 한다.
내가 쓰는 글에서 새로운 단어나 배울 것이 없다면 내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쉽게 읽히고, 사전을 찾는 수고로움을 주지 않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박완서 작가는 글을 쓸 때 문장에 적합한 단어를 떠올리느라 하루를 고생했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나는 박완서 작가처럼 멋진 글을 쓰는 작가는 아니지만 내 글에 쓰인 단어들을 애정한다. 그러니 기꺼이 사전을 펼치고 검색을 해준다면 감사하겠다. 위대한 작가의 행보를 따라가며 뒷꿈치라도 닮은 글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