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당신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코앞에 두고, 그저 또 내가 당하고만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을 당신이 불쌍하단 생각을 하고 맙니다.
한 번도 가족을 귀히 여겨준 적 없고 당신 본인만 희생했다 여김으로써 참 오래도 우리를 비참한 동굴 속에 가둬두고, 당신 없는 집을 10년 동안 지키는 동안에도 당신은 어디서 무얼 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당신에게는 그저 당신 돈을 축내는 원수였을지라도 이제는 우리가 없을 이 큰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질 당신을 생각하니 왜 이렇게 처량한지요. 정작 당신은 눈 하나 깜짝 안 할 테고, 오히려 더 살기 어린 눈으로 날 쫓아올 텐데요.
아마 앞으로 시작될 당신과의 진흙탕 싸움에서 당신은 잔인할 테고 나는 애써 덤덤할 겁니다.
혹여나 미련이란 건 추호도 없는 나지만 내 평생 누군가에게라도 이렇게까지 매몰차 본 일이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유불문하고 당신에게 미안해지기까지 할 겁니다.
끊임없이 내 자존감을 움켜쥐고 지하 저 밑바닥까지 잡아끌어 내린 당신 덕분에 악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리멘탈은 어쩌할 도리가 없는 탓에 그저 나 당한 건 뒤로 한채 당신에게 미안해질 거라 예상해 봅니다.
이 순간에도 당신이 들어오는 소리에 쥐 죽은 듯 자는 척을 하며 미친 듯 날뛰는 내 심장이 지금 내가 누운 이 침대를 뚫고 땅까지 닿는 건 아닐지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이렇게까지 싫은 당신에게 난 왜 미안해야 할까요.
당신도 어쩌면 내가 아니었더라면,
그런 당신이라도 버선발로 뛰쳐나와 고단한 퇴근길을 반겨 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명 나게 얻어먹는 욕지거리에 지겹게도 벗어나고만 싶은 집구석이었지만 오늘은 어쩌면 당신도 내가 아니었더라면... 아직 덜 당했나 싶은 머저리 같은 생각을 해봅니다.
이쯤에서 당신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내 입장에서 제일 불쌍한 나부터 일단 이 불행에서 꺼내야겠습니다.
본인 잘 난 맛에 사는 사람인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건지... 내 코가 석자라 당신 걱정은 오늘까지만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