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래힘 Jun 16. 2023

어쩌면 당신도

내가 아니었더라면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당신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코앞에 두고, 그저 또 내가 당하고만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을 당신이 불쌍하단 생각 하고 맙니다.


한 번도 가족을 귀히 여겨준 적 없고 당신 본인만 희생했다 여김으로써 참 오래도 우리를 비참한 동굴 속에 가둬두고, 당신 없는 집을 10년 동안 지키는 동안에도 당신은 어디서 무얼 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당신에게는 그저 당신 돈을 축내는 원수였을지라도 이제는 우리가 없 이 큰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질 당신을 생각하니 왜 이렇게 처량한지요. 정작 당신은 눈 하나 깜짝 안 할 고, 오히려 더 살기 어린 눈으로 날 쫓아올 텐데요.


아마 앞으로 시작될 당신과의 진흙탕 싸움에서 당신은 잔인할 테고 나는 애써 덤덤할 겁니다.

혹여나 미련이란 건 추호도 없는 나지만 내 평생 누군가에게라도 이렇게까지 매몰차 본 일이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유불문하고 당신에게 미안해지기까지 할 겁니다.


끊임없이 내 자존감을 움켜쥐고 지하 저 밑바닥까지 잡아끌어 내린 당신 덕분에 악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리멘어쩌할 도리가 없는 탓에 그저 나 당한 건 뒤로 한채 당신에게 미안해질 거라 예상해 봅니다.


이 순간에도 당신이 들어오는 소리에 쥐 죽은 듯 자는 척을 하며 미친 듯 날뛰는 내 심장이 지금 내가 누운 이 침대를 뚫고 땅까지 닿는 건 아닐지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이렇게까지 싫은 당신에게  미안해야 할까요.


당신도 어쩌면 내가 아니었더라면,

그런 당신이라도 버선발로 뛰쳐나와 고단한 퇴근길을 반겨 주었을지도 모겠습니다.


신명 나게 얻어먹 욕지거리에 지겹게도 벗어나고만 싶은 집구석이었지만 오늘은 어쩌면 당신도 내가 아니었더라면... 아직 덜 당했나 싶은 머저리 같은 생각해봅니다.


이쯤에서 당신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입장에서 제일 불쌍한 나부터 일단 이 불행에서 꺼내야겠습니다.


본인 잘 난 맛에 사는 사람인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건지... 내 코가 석자 당신 걱정은 오늘까지만 할게요.


작가의 이전글 다시 찾아온 몹쓸 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