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이 아닌 외출. 둘 다 집에서 나간다라는 의미는 동일한데 가출에는 부정이 의미가 가득하다. 신기한 한글의 세계. 가출이든 외출이든 와이프는 집을 나갔다. 종로에서 대학 친구들과 점심을 먹기로. 오랜만의 바깥 생활. 와이프의 외출을 장려하는 자로서는 긍정의 집 나감이다.
육아휴직으로 매일 아기와 씨름하는 와이프. 가끔씩 바깥바람이라도 쐬어야 숨통을 트이지 않을까 싶은데.그리하여 어디를 나가라 친구를 만나라 등등을 귄유하지만 집순이인 와이프는 집이 더 좋다고 한다. 어쨌거나 오랜만의 외출이 힐링이 되기를.
엄마 잘 다녀오세요
아기와 함께 현관에서 엄마를 배웅했다. 엄마의 환한 미소와 한낮의 밝은 햇빛이 집으로 들어왔다.허나 현관문이 닫힘과 곧 사라져 버린 밝은 기운. 엄마의 존재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아기와 나만이 공간의 적적함을 메웠다.
원래 이랬었나. 가끔씩 짧은 외출을 하기도 했을 때 이런 적적함까지는 아니었는데. 와이프가 장시간 비운다는 사실 때문인지 한낮의 햇빛이 갑자기 사라져서인지.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기와 나 사이에는 어색함이 존재했다.
시계는 12시를 가리켰다.
아기가 태어나고 제대로 된 음식을 해 먹기가 쉽지 않다. 아직 기지도 서지도 못하는 옹알이 아기라면 더더구나. 덕분에 이용하게 되는 배달 주문. 핸드폰에 수많은 메뉴가 줄 서 있었지만 옹알이 아기를 키우는 남자 1인이 선택할 메뉴는 한정되어 있다. 짜장면 떡볶이 햄버거 같은 간편식으로. 아 여름이니깐 냉면까지 추가.
무얼 먹을까. 딱히 구미가 당기는 건 없으나 배꼽시계는 밥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제한된 메뉴 속 제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햄버거를 선택. 옹알이 아기를 키우게 되면 취향보다는 편의성과 효율성이 좋은 음식을 선택하게 된다. 맛과는 상관없이 가장 가까운 집 앞 가게의 햄버거 세트 메뉴를 선택했다. 최종 결제를 하려니 쑥 하고 올라간 금액. 메뉴를 잘못 눌렀나 싶어 다시 확인했더니 배달비가 추가되어 있었다. 그것도 4000원씩이나. 세상에나 마상에나. 바로 집 앞에 있는데 햄버거 하나 가격을 배달비로 지불하게 되는 셈이었다. 슬며시 배달 주문을 포장으로 변경했다. 요새는 카드로 결제를 하니 땅을 파도 지폐 줍기도 어렵지 않은가.
아기야 나갔다 오자.
엄마가 외출 여부를 모르는 천진난만 아기. 완전한 타의와 일방적 소통으로 아기에게 외출 소식을 알렸다. 오 분 남짓한 거리의 햄버거 가게. 유모차를 태우고 다녀오면 금방이었다. 허나 생각한 대로 되면 인생이 아니라고 하였나. 혹은 드라마이거나. (물론 나에겐 시트콤이 더 어울리겠지만) 오분일 거라는 거리 예측은 확실하게 틀렸다.
유모차 속 아기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아기가 불편을 표출했다. 잠시 길을 멈추고 유모차 속 아기 몸을 반듯하게하고 다시 움직였다. 허나징징거림은 더 심해졌고 곧 울음을 터트렸다. 상대는 조금만 참아달라는 부탁을 할 수없는, 의사소통이 불가한 옹알이 아기.
아기의 울음은 점점 커져갔다. 계속 우는 아기를 마냥 두기에는 유모차가 너무 들썩들썩. 길거리의 사람들은 수근수근대는 느낌이었다. 결국 아기를 유모차에서 꺼내어 달래주는 방법뿐. 유모차 안은 텅 빈 공간이 되었다.
핸드폰에는 픽업 메시지가 떴고.
그 와중에 햄버거를 픽업하라는 알람이 왔다. 건널목만 건너면 되는데.눈앞에 햄버거 가게가 있는데. 한 손에는 징징대는 아기는 안겨 있고 한 손에는 유모차가 있고. 유모차를 그대로 끌고 가자니 아기를 안은 채 건널목을 건너는 것은 위험했다.
진퇴양난 옴짝달싹 안절부절. 결국 유모차를 접고 건널목을 건너기로 했다. 한 손에는 유모차를 한 손에는 아기를. 양손에 8킬로 이상의 무게를 들고 건널목을 건너는 아빠. 나도 모르게 슈퍼맨이 되어 버렸다. 햄버거를 픽업하기 위해 길을 건너는 슈퍼맨.
우여곡절 끝에 도작한 햄버거 가게.
분명 픽업 수령 메시지를 받았는데 알림판에는 픽업 번호가 없었다. 짧은 건널목이었지만 무더운 여름은 금세 땀으로 샤워를 하게 했다. 우선은 픽업 번호가 뜨기를 기다리며 숨을 고르기로. 유모차를 내려놓고 아기를 안은 채 철제 의자에 앉았다. 고맙게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에어컨 바람이 나를 달래주어서인가. 배달을 포장 주문으로 바꾼 무모한 내가 잠시 원망스러워졌다. 그때 뒤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쉰 목소리.
네가 여기서 나이가 제일 적고
내가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네
뒤를 돌아보니 투명한 안경테에 알이 큰 안경을 낀 할아버지가 있었다. 아기를 귀엽게바라보시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시는 처음 보는 할아버지. 살짝 눈이 마주쳤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아직 어색한 나는 그저 흐흐- 하는 실없는 웃음을 보였다. 픽업 번호는 여전히 뜨질 않았고 땀은 식어가고 있었다. 뭐가 이상한데 싶어 확인을 하러 카운터로 향하기로 했다. 카운터 앞에서자 이번에는 옆에서 스윽하고 또다시 들리는 쉰 목소리.
할아버지가 먼저 가져갈게 맛있게 먹어
어어. 넹~ 맛있게 드세용~
처음 본 할아버지는 두 번이나 말을 걸었다. 그렇다고 아기 목소리를 빌어 응답을 할 줄이야. 옹알이 아기를 데리고 밖을 돌아다니면이렇게 되나 싶었다.처음 보는 사람과 아기를 빌미로 대화를 하게 되는.
할아버지는 자리로 돌아가셨고 나는 카운터에 햄버거의 행방을 문의하였다. 그러자 픽업을 하러 오지 않아 따로 빼놓았다며 주문한 햄버거 세트를 바로 내어주는 친절한 직원. 유모차와 아기와 씨름한 시간이 꽤 걸렸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머나먼 여정의 끝이 보였다.
햄버거 가게를 나오면서 할아버지에게 슬쩍 눈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음료수를 마시면서 아기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셨다.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관심을 보여서인가 그 사이 칭얼거리던 아기는 순한 양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순탄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에어컨 리모컨을 찾았다.
아기의 조그만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시원한 공기가 서서히 집 안을 채웠다. 아기는 금세 새근새근 잠이 들었고 거실 매트에 조심히 아기를 눕혔다. 드디어 주어진 자유 시간이자 소중한 식사시간. 언제 깰지 모르는 아기를 바라보며 먹는 잠깐의 식사지만 두 손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픽업 시간이 지나 선지 온기가 없어진 햄버거. 하지만 한 입 베어 문 입 안에는 달콤함이 퍼져갔다. 햄버거가 이리도 맛있는 음식이었던가. 온기는 없지만 입안은 따뜻했다. 햄버거 가게에서 본 처음 보는 할아버지는 집에 가셨으려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 보는 할아버지와 햄버거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느낌.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기에게 방긋 웃어주었던 것처럼 부디 할아버지를 방긋 웃게 해 주는 사람이었으면. 지금껏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으셨을 텐데 이제는 행복함만 느끼셔도 되지 않겠는가. 햄버거 가게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셨던 분이니깐 말이다.
햄버거 가게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아기는 꿀잠을 자고 있다. 햄버거는 이미 다 먹었다. 이제 남은 건 엄마의 복귀뿐이다. 와이프여. 이제 돌아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