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 1664를 아시나요

분위기는 맛을 더 풍요롭게 해 준다

by 이보소

나는 카스나 테라 정도 맥주의 전부인 줄 는 막입 스타일이다.(선입견의 파괴가 일어나기 전까진) 맛으로 술을 마시기보다 분위기로 마시는 타입이라 마트 진열대의 수입맥주는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밥 역시도 배만 채우면 되니 미식계의 외골수라 해두자.


한국 맥주가 맥주 아닌가요-를 외치는 소나무 취향은 프랑스 파리에서 부서졌다. 회사 장기근속 휴가를 알차게 보내기 위해 결정한 10일간의 유럽 여행. 탈리아 스위스를 거 도착한 마지막 행선지 프랑스 파리였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으레 본다는 혹은 보아야 한다는 에펠탑. 한국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이었고 그날은 한국 민박에서 돈을 잃어버린 날이었다. (아는 놈들이 더 한다더니.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억울함. 도둑놈은 히 벌 받았을지어. 억울함이 떠올라 잠시 옆길로 샜다)


다시 파리로 돌아가자면 그날은 우중충하긴 했으나 비는 오지 않았고 한국이었으면 습했을 테지만 습하진 않았던 그런 날씨였다. 습기가 없어 에펠탑 앞 잔디밭에 앉을 수 있었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여유를 즐겼다. 평일 낮시간 때문인가 아니면 땅덩어리의 차이 때문인가. 한국의 자랑 한강공원의 오밀조밀 밀집도와 다른 이유 뭘까하고 바라본 에펠탑의 잔디밭 풍경은 이러했다.


서로 음식을 먹여주는 연인들(대체로 한국보다 연인 간의 밀착도가 높고 진하다) 소풍을 온 듯한 어린아이들(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은 만국 공통인 듯하다) 오붓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보기 좋은 스윗함. 나도 나중에는) 등등. 머리 색깔은 다르지만 여유를 즐기는 데는 한국이나 프랑스나 차이가 없었다. 위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의 현실 체험.


흐린 날씨 덕분인지 눈에 에펠탑은 그저 철제 덩어리였다. 감상 후 오는 허기짐. 시계를 보니 점심때를 가리켰. 에펠탑 근처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찾기로 했다. 프랑스인들처럼 잔디밭에서 여유와 점심을 함께 기려는 계획과 함께.


근방의 조그만 베이커리를 들렸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입구 앞 쪽에 자리한 납작한 빵 덩어리가 이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인 것 같았다. 맛있을 것 같은 녀석을 하나 집어 계산을 했다. 영수증을 봐도 모르겠는 녀석의 이름은 훗날 파니니로 밝혀졌다. 프랑스 파리 바게트가 유명한 것이 아니었나. 심지어 그 가게에는 바게트 없었다. 선입견의 파괴의 현장 험.


처음 보는 빵이 텁텁까 싶어 바로 옆 편의도 들렸다. 곁들 음료로는 맥주 선택. 진열대에 테라는 없었고 파랑 분위기의 맥주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녀석의 이름은 블랑 1664. 음 보는 녀석의 느낌은 '나! 유럽'이었다.


파니니와 블랑 1664를 들고 에펠탑이 잘 보이는 잔디밭 명당자리로 향했다. 아까보다 날씨가 더 우중충해 있었다. 철제 덩어리인 에펠탑은 더 어워진 느낌었다. 어쨌거나 에펠탑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배를 채우기로.


목이 말라 블랑 1664를 먼저 들이켰다. 생애 최초 블랑 1664와의 만남 그리고 첫 목 넘김. 이게 뭔가 싶었다. 한국의 맥주에는 쓴맛이 있는데 프랑스 맥주에는 상쾌함과 청량이 있었다. 광고에서 그토록 자랑하던 시원함을 먼 타국에서 느끼게 되었다. 이건 찐 맥주다. 그간의 한국 맥주는 맥주라는 가면이었구나. 세상에는 맛있는 맥주들이 많구나. 파니니에 이은 또 한 번의 선입견 파괴. 초 계획은 파니니가 메인이었지만 안주로 락해버렸다. 어두운 에펠탑이 조금 밝아진 듯도 했다. 블랑 1664와 파니니의 조합은 가히 최고였다.


그로부터 약 8년이 지났다. 그 사이 직장을 두 번 옮겼고 결혼을 했고 아기가 생겼다. 백일이 갓 지난 아기. 누가 백일의 기적이라 하였는가. 여전히 불규칙한 낮밤다. 그래도 조금은 잠이 길어지긴 했으니 백일의 변화 정도가 옳겠다.


어쩌면 또 침해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기띠에 있던 아기가 싫다고 발버둥 친 게 1시. 아기띠를 풀고 품에서 안아 달래준 것이 2시. 다시 좀 잠잠해져 아기띠로 아기를 안은 것이 3시다. 다행히도 내일은 휴일이고 이제는 아기가 잠든 것 같은 것이 위안이다. 물론 지금의 잠듦이 숙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자칫하면 아침해를 볼 지 모르니 항시 긴장을 해야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기를 숙면으로 연결하기 위해 아기띠에서 좀 더 재우기로 한다. 하루 종일 육아에 시달린 와이프는 잠 삼매경에 빠져 있다. 고요한 새벽 와이프가 사 온 맥주 한 캔이 생각났다. 백일 넘게 술을 입에 대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블랑 1664를 사다 고마운 와이프. 고요함과 맥주.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혹시 잠에서 깰까 봐 조심스레 캔을 땄다. 아기띠 속 아기의 미간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 캔을 따던 손가락이 잠시 긴장했지만 이내 평온해진 아기 얼굴에 시 평온해졌다. 한가롭게 안주를 챙겨 먹을 수도 없는 터라 입 벌리고 있는 아기 얼굴을 한 번 보고 맥주 한 모금을 다. 맥주가 이리 달았던가. 맥주 한 모금에 아기 얼굴 한 번. 또다시 맥주 한 모금에 아기 얼굴 두 번. 참 뽀얗고 귀엽고 앙증맞다. 프랑스 파리 때보다 맥주가 단 느낌이다. 파니니는 없지만 그깟 안주가 뭐 필요하겠나. 사랑스러운 아들이 특급 안주인 것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안주는 필요 없다. 추억과 소중함이 함께하는 새벽.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니 미래는 행복할 것만 같다. 당장의 미래를 예상컨대 눈앞의 아기가 아침까지 안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다.

제발요탁합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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