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대디라 미안합니다

그렇다면 진심을 전달해보세요

by 이보소

나는 광고 대행사에 다니는 워킹 대디이다.

업의 특성상 일의 상대는 광고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케팅 고민을 얘기하고 나는 고민 해결을 위한 솔루션을 제시한다. 솔루션을 받은 의뢰인은 대가를 지불한다.


자연스레 정해지는 갑과 을의 관계. 갑이 말하면 을은 최대한 들어준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갑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그래야 을들의 집합소인 광고대행사가 먹고 사니깐. 그래야 구성원인 나도 먹고 사니깐. 자본의 출발지에 따라 정리되는 관계의 정립. 씁쓸하지만 이것이 자본주의다. 머니 이즈 파워.


광고대행사에 다니면 경쟁 PT를 한다.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꾸준히. 지겹지만 마냥 지겹지도 않다. 새로운 분야를 파헤치고 트렌드를 분석하고 이를 광고적으로 해석하는 일. 업에 있어 재미요소다. 명품 거래업, 학습기기업, 코인 사업 등등. 평소라면 관심 갖지 않을 분야들. 광고대행사에 다니니 접할 수 있는 일들이다.


재미에 비해 업무 파트너들은 유쾌하지 않다. 의뢰자인 광고주는 일감을 던지고 광고 대행사는 그들이 던진 일을 한다. 본래 갑과 을은 친한 관계가 될 수 없는 법. 때로 무자비한 갑들을 만나면 을은 곤혹을 경험하기도 한다.


우린 이 날 PT를 할 거예요.

경쟁 PT 의뢰가 들어왔다. 이번 경쟁 PT의 주인공은 여행 앱. 그들이 정한 '이 날'이 되기까지의 일정은 대체로 짧다. 길면 3주 짧으면 1주 남짓한 일정. 이번에는 그 중간인 2주 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 사이에 그들의 고민을 해결할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광고는 아이디어 싸움인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는 야근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가 된다.


혹시 PT날짜를 미룰 순 없나요.

라고 되묻는다면 'NO'라고 돌아올 확률이 90프로 이상. 괜한 신경을 건드려 PT 선정에 불이익이 갈 바에야 으레 갑이 정한 날을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을에게는 주말이 있지 않은가. 하하핫...


만약 주말까지 일했는데도 경쟁 PT에서 떨어진다면. PT 이후 그 광고주의 사업은 철저히 외면을 한다. 더불어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용을 금지하라는 바이럴 활동까지도. 이런 작은 행동이라도 해야 을의 스트레스 지수를 낮출 수 있다. 건강한 광고 대행사인을 위한 행동 강령.


야근이라 늦어집니다.

늦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연거푸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되었다. PT 과제가 변경되어서 수정. 내부 리뷰 과정에서 수정. 수정 수정 수정. 부르기 싫은 그 이름 오수정이여. PT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수정사항이 꽤 많다.


광고는 아이디어의 일이기도 하지만 협업의 일이기도 하다. 내 것만 다했다고 일이 끝나지 않는다. 내 파트와 다른 파트를 합치고. 다른 부서의 자료도 합치고. 합친다고 끝이 아니다. 키 콘셉트에 맞추어 하나의 통일된 흐름으로 제안서를 완성해야 한다. 따로국밥이 아닌 잘 조합된 카스텔라처럼.


기한 내 완성본을 만들 수 있을까. 경쟁 PT 때마다 하는 걱정이다. 물론 과적으로 어떻게든 하고야 만다. 매번 언제나 항상. 신기한 경쟁 PT 세상. 이럴 때마다 인간은 신을 뛰어넘는 존재인 것만 같다.


오늘 많이 늦어질 것 같아요. 저녁 챙겨 먹어요.

공식적인 퇴근 시간은 6시 30분. 업무 진도 상 도저히 퇴근 시간에 퇴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잠깐의 여유를 틈타 전화로 와이프에게 야근 소식을 알린다. 아기 때문에 정신이 없을까 봐 일반 통화를 누른다. 와이프는 아기를 보여준다고 일반 통화를 영상 통화로 바꾼다. 아름다운 동상이몽.


전화기 속 사람이 아빠인지 남인지 모르는 아기는 물끄러미 화면을 보다 이내 여기저기를 두리번댄다. 아기 이름을 불러보지만 관심은 자기 입에 들어갈 거 찾기다. 자기의 손가락을 빠는 소리가 쩝쩝 하고 퍼진다. 짧은 통화였지만 업무 스트레스가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다.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온다. 아기의 잔상이 남아 있다. 아기 뒤에 있던 와이프의 얼굴도 떠오른다. 예전에는 와이프 얼굴만을 보며 통화를 했는데 이제 와이프 얼굴은 아기 뒤로 빠져있다. 제쯤 와이프와 전면 통화를 할 수 있을까. 아기도 사랑하지만 와이프도 사랑한다. 죽을 때까지 엄마가 아닌 여자로 사랑할 것이다.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였으니깐.


저녁은 배달 주문이다.

업무 진도가 얼마 나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후 8시다. 저녁을 먹어야겠다. 팀 사람들과 메뉴를 정하고 팀의 막내가 배달 주문을 한다. 지금 주문을 하면 언제 밥을 먹고 언제 제안서를 쓸지. 아무래도 퇴근 시간이 많이 늦어질 것 같다.


훌쩍 지난 시간을 보니 미안함이 피어오른다. 갑작스레 생긴 아기 때문에 정신없이 맞이한 아기. 아기가 태어난 이후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군분투하는 와이프. 일찍 퇴근이라도 해서 힘을 보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마음이 불편하다.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미안함의 세기는 강해진다. 야근일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미안함의 크기는 커진다. 마치 복리처럼.


워킹대디라 미안합니다.

이 모든 건 워킹대디인 내 탓이다. 'NO' 워킹대디가 되어야겠다. 일하지 않아도 소득이 들어오는 경제적 자유. 목표가 생겼다. 최종 깃발을 뽑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목표를 위해 무언가를 하자.

그나저나 저기요. 목표보다 일단 경쟁 PT부터 마무리하셔야겠는데요.

시계는 오후 11시를 가리킨다.


이제는 야근 택시가 익숙하다.

사회 초년생 때는 야근 택시가 어색했는데, 이제는 늦은 밤 풍경을 즐길 정도로 익숙해졌다. 몸은 피곤하지만 가는 길은 편안한 야근 택시. 밤 풍경에 취해 나 홀로 단상에 잠기려 하면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다. 야근 택시는 참 빠르기도 하다.


와이프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다 주고 싶은데 늦은 시간 아이스크림 가게는 불이 꺼져 있다. 다 워킹대디인 내 탓이다. 경쟁 PT가 끝나면 아이스크림을 꼭 사줄 것이다. 마음의 미안함이 조금이라도 녹아내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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