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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소 Apr 03. 2023

14개월 아들의 시금치 된장국

된장의 농도가 진해질 때까지 추억 쌓기

시금치와 두부, 애호박을 잘게 깍둑 썬다. 미리 여둔 멸치 육수에 된장을 살짝 풀고 깍둑 썬 재료를 넣는다. 자근하게 끓어오르는 된장물에 재료들이 익는다. 시간이 지났다 싶어 한 스푼 떠서 맛을 본다. 후르룹. 진하지는 않지만 은은 짭조름함이 느껴진. 됐다! 생후 14개월 아들이 처음 맛볼 시금치 된장국완성.


출근 전 아아침준비했다. 과 밥. 약간의 버섯과 당근. 그리고 14개월 아들에게 바치는 458개월 아빠의 시금치 된장국. 개월수 차이 상당하지만 음식이라고는 23개월 전 결혼을 하고부터 시작했으니 짧은 음식 경력 치고는 나쁘지 않은 맛이다. 안방 문을 열어본다. 아내는 여전히 침대와 물아일체다. 임신 순간부터 언제 어디서나 아기와 함께하는 아내. 안쓰럽고 미안한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소소한 일, 바로 출근 전 아침을 먹이는 일이다. (그마저도 출근 시간이 되면 숟가락을 놓고 출근을 해야 하지만) 14개월 아기와의 식사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아침을 모두 먹이고 집을 나서면 그날은 뿌듯한 출근길이 된다. 아내에게 소량의 피로 회복제를 전달한 것만 같은 혼자만 아는 그런 뿌듯함. 시금치 된장국이 식기 전에 아침을 먹이고 싶은데 아기는 앙증맞은 입으로 우유를 쪽쪽 빨고 있다.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사이 땀까지 흘린다. 아침밥을 먹이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다.


아기 된장국을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간 간이 안 된 음식만을 먹였기에 된장국은 아기 식단 없었다. 우리 집만의 칙이 깨진 건 어린이집 생활 3주 차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한 시간의 적응단계에서 점심 식사하고 하원하기 활동이 추가되었다. 첫 점심을 먹고 온 날이었다. 그날은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재택 근무일이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아내와 함께 하원하는 아기를 배웅하러 갔다.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곧 두 명의 선생님이 다섯 명의 아이를 들고 메고 엄마들에게로 왔다. 아기새 같은 아기들은 각자의 엄마에게로 가기 바빴다. 아장아장 엉금엉금. 아기들이 엄마 품에 안기자 그제야 선생님들이 어린이집 일과를 얘기했다.

"이랑 △이랑은 점심을 아주 잘 먹었어요. 원장 선생님도 처음 먹는 거 맞냐면서 왜 이렇게 잘 먹냐고 하더라고요. 아주 잘 먹었어요."

다음은 우리 아기의 차례였다. 다른 아기보다 개월수가 빨라 발달도 앞서가는 아기. 이미 유아식도 하고 우걱우걱 잘 먹는 먹성 덕분에 너무 잘 먹어서 걱정이라는, '잘났어 정말'의 피드백이 예상되었다.

"우리 ○이 음식을 뱉어내네요. 숟가락으로 장난치고 해서 한 숟가락 먹었어요."

예상과는 거리가 먼 선생님의 이야기에 고개가 갸우뚱했다.

'아니, 한 숟가락만? 른 아기들은 잘 먹었다는데 왜 우리 아기는 안 먹었지? 음식이 입에 안 맞으면 뱉어내기도 하고 숟가락으로 장난치는 것도 맞는데. 지금껏 먹성을 보면 한 숟가락만 먹을 아이가 절대 아닐 텐데. 다른 아기 밥 먹을 동안 우리 아기는 뭘 하고 있었을까.'

모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 분여의 짧은 거리 동안 아내는 내내 밥을 안 먹인 거 아니냐며 원망 섞인 소리를 했다. 나 또한 밥을 못 먹었다는 아기가 안쓰러웠지만 괜히 어린이집에 반감이 생길까 봐 '첫날이니까'라는 다섯 글자로 아내를 다독였다. 집에 돌아와 11kg의 아기를 들어 올렸다. 밥을 먹었을 때의 묵직한 무게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밥을 먹었다면 빵빵해야 할 배가 홀쭉해져 있었다. 점심을 먹는다 해서 일부러 아침도 조금 먹이고 등원을 했는데 말이다. 바로 먹을 수 있는 감자와 딸기, 망고를 잘라줬더니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조그마한 손으로 우! 우! 를 외치며 강아지 인형에게도 먹여주면서.


밥을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는 아내의 추론엄마들의 단톡방에서 검증이 되었다. 다들 아기가 배고파하여 허겁지겁 점심을 먹였다는, 아기 알림장에 모두 한 마디씩 하자는 엄마들의 이야기. 저녁 7시. 핸드폰의 알림장이 울렸다. 음식을 뱉어내어 가정에서도 관리가 필요하다는 선생님의 전달 사항. 알림장에는 아기 앞에 놓여 있는 식판 사진도 있었다. 식판의 음식에는 미역국과 백김치가 놓여 있었다. 집에서는 잘 먹지 않는 음식들이었다. 음식을 뱉어낸 것은 아기 입맛에 안 맞아서였을지도. 지금까지 간 없이 오로지 무염 유아식만을 먹인 탓에 어린이집 음식이 낯설 수도 있겠다 싶었다. 순간 아기의 적응을 위해서라도 간이 된 음식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간을 한 아기의 첫 음식. 458개월 아빠의 시금치 된장국이었다.


아기가 우유를 다 마셨다. 끄억 소리와 함께 빈 우유병을 들고 아장아장 돌아다닌다. 시계를 보니 출근 10분 전이다. 의자에 아기를 앉히고 음식을 떠 먹인다. 아기의 첫 시금치 된장국국에 밥을 말지 않고 어린이집처럼 밥과 국을 따로 하여 먹인다. 한 입 그리고 두 입. 숟가락으로 장난을 쳐서 국이 튄다. 그러더니 갑자기 숟가락을 버리고 손으로 두부와 호박을 꺼내어 자기 입으로 가져간다. 맛을 탐색하고는 곧 국그릇 자체를 들고 얼굴로 가져간다. 조그마한 입으로 국물을 쪽쪽. 입맛에 맞나 보다. 첫 시금치 된장국은 성공적이었다.

출근 시간이 다 되었다. 입 안에 밥알이 가득한 아기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해준다.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육아의 맛이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된장의 농도가 진해지기 전 아기와 더 많은 사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기에 아낌없이 추억을 쌓아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아파트 문을 나선다. 아침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유난히 싱그럽다. 지하철 역을 향하는 발걸음 역시 가볍다.


첫 시금치 된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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